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다. (중략) 가는 곳마다 모델 탤런트 아닌 사람 없고 가는 곳마다 술과 고기가 넘쳐나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 (중략) 세속도시의 즐거움에 동참하고 싶은 자들 압구정동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쓰는구나”Q. 영화에 대한 반응이 조금 갈리는 분위기입니다.
시인 유하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연작시에서 강남을 이렇게 묘사했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연작은 서울 강남의 탈바뀜의 기간이 자신의 성장기와 일치했던 강남에 사는 한 시인의 도시문명론이다. 그리고 시인은 감독이 된 후에도 영화를 통해 꾸준히 강남의 들끓는 욕망을 이야기 했다. 영화 ‘강남 1970’은 2004년 ‘말죽거리 잔혹사’와 2006년 ‘비열한 거리’를 잇는 유하 감독의 ‘강남 3부작’의 완결편이다. 바람 부는 날, 압구정동에서 유하 감독을 만나 영화에 대해 물었다..
유하: ‘강남 1970’은 원초적으로 재미있게 만들어진 작품이라기보다는 고전서사의 틀이 갖춰진 영화예요. 지금 관객들에게는 고리타분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Q. 관객이 고리타분하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만든 이유는 뭔가요.
유하: 제 성향인 것 같아요. 고전적 의미에서의 스토리를 지향하는 편이거든요. 기승전결이 있고 클라이맥스가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많아요. 지금의 많은 영화들은 서사보다 퍼포먼스적인 요소가 강하잖아요? 저는 그 믿음은 있어요. 영화든 소설이든 서사가 중심이라는 믿음이요.
Q. 서사 이야기를 하셨는데, 감독 이전에 시인이셨잖아요? 왜, 시상(詩想)이라고 하죠. 시상을 이미지에서 찾는 분들이 많던데, 시를 쓸 때는 어떠셨나요?
유하: 저는 시도 이야기에서 출발해요.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써 놓은 다음에, 쳐내고 쳐 낸 후 세 줄만 남겨서 시를 발표하곤 했어요. 대중적으로 성공한 시집이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인데 그 시집에도 이야기가 있어요. ‘강남 1970’은 그 시집의 연작 1편에 해당하는 시상을 영화로 스토리화 시킨 거고요.
Q. 시가 영화가 재탄생 되는 건, 드문 현상이긴 해요.
유하: 그래서 당시 어떤 제작자가 “시인데 스토리성이 있다. 이걸 끄집어내서 영화를 만들면 재미있겠다. 이명세 감독님이 해주면 좋을 것 같다”며 판권을 팔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저의 무모함이 발동했어요. “제가 하고 싶다!”고 털컥 한 거죠.(웃음) 그렇게 얼떨결에 이 바닥에 나오게 됐어요.

유하: 아마 시인으로서의 스타성을 높이 샀던 것 같아요. 시인이 영화를 만드는 일이 흔하지 않잖아요. 영화감독으로서의 기대를 가지고 저에게 돈을 투자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Q. 지금도 시를 쓰시나요?
유하: 안 써요. 아니, 안 쓰는 게 아니고 못 쓰고 있어요. 2000년대 이후로 시가 나오지 않더라고요. 저는 멀티 플레이어는 아닌가 봐요. 영화에 몰두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시인으로서의 어떤 자아는 도망가 버렸어요.
Q. 시에 대한 갈증은 없나요?
유하: 영화가 워낙 다이내믹해서 그건 못 느끼겠어요. 영화를 기획해서 시나리오를 쓰고, 만들고, 기자 시사회를 열고, 무대 인사를 하고, 비평까지 가는데 ‘업 앤 다운’이 굉장히 심해요. 그것 자체로도 감당이 안 돼요.
Q. 이야기를 중요시 하시지만, 감독님 작품에서 이미지도 빼놓을 수 없어요. 액션이 특히 그렇죠. ‘강남 1970’ 진흙탕 액션씬이 굉장히 인상적인데, ‘비열한 거리’에도 진흙탕 액션씬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유하: 맞아요. ‘비열한 거리’는 의도된 거였고, 이번 건 우연의 결과예요.
Q. 네? 그 반대 아닌가요? 이번에야 말로 작정하고 진흙탕 액션을 찍으신 줄 알았어요.
유하: ‘비열한 거리’ 터널 씬을 찍을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생존을 걸고 싸우는 조폭들의 이전투구를 통해 야만성과 비루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요. 그래서 스태프들에게 “진흙을 몇 트럭 구해와라”해서 진흙을 깔고 액션을 찍었어요. ‘강남 1970’의 경우엔 진흙보다는 공동묘지라는 장소를 통해 거대한 지옥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촬영 일주일 전부터 비가 계속 오더라고요. 투입된 인원은 많고, 비는 계속 오고. 그러다보니 의도치 않게 진흙탕이 돼버린 거예요. 사실, 걱정을 많이 했어요.
Q. 그런데 그게 결국 ‘신의 한 수’가 됐네요.
유하: 하하. 덕분에 배우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민호의 경우 촬영 도중 발톱이 빠지기도 해서 특히 힘들었을 거예요.

유하: 맞아요. 조인성이 돌려차기를 하다가 인대가 파열돼서, 20일 가까이 영화를 못 찍었죠. 제가 리얼 액션을 추구하다보니… 허허허.
Q. ‘현장에서 유하 감독은 독하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오나 봐요.(웃음)
유하: 하하. 제가 독하다기보다는 배우들의 투지가 대단해요. 인성이의 경우 당시 굉장히 절박했기 때문에 본인이 대역을 안 쓰고 모두 하려했어요. 열정이 높다 보니 부상 위험도 컸죠. 민호도 첫 주연영화다보니 욕심이 많았을 거예요.
Q. 권상우-조인성-이민호에 대해서는 많은 인터뷰에서 말씀 하셔서 굳이 묻지 않을게요. 그보다 궁금한 건 ‘하울링’이에요. ‘하울링’에서는 이미 너무나 완벽하게 자리 잡은 송강호라는 배우와 함께 하셨잖아요? 그래서인지, 감독님 이력 중에 이 영화의 캐스팅이 오히려 독특하게 다가와요.
유하: 그것도 사연이 있어요. ‘하울링’ 때는 사실 여배우 원톱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덜컥 송강호 씨가 영화를 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좋다기보다는 좀 놀랐어요. 분량도 많지 않은 역할인데, 이걸 왜? 싶었던 거예요. 사실 이전부터 송강호 씨와는 작품을 하고 싶은 욕심 있었지만, 그건 송강호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였거든요. 그래서 술자리에서 “크지 않은 역할을 왜 하려고 하냐” 물어봤죠. 그랬더니 본인도 한 번 받쳐주는 역할을 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분량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런데 제 입장을 또 다르잖아요. 너무 고맙고 큰 빚을 진 것 같고.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분량을 여배우와 맞춰야겠다’ 해서 시나리오를 수정했죠. 그렇게 해서 지금의 ‘하울링’이 된 건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송강호 씨와는 정말 제대로 한 번 해 보고 싶어요.
Q. 감독님 고향이 서울이 아니시죠?
유하: 전라북도 고창이 고향이에요. 시골에 살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에 올라왔어요. 처음에는 강북에 살았어요. 전세로 왔다 갔다 살다가 부모님이 집을 살 요량으로 강남으로 이사를 갔어요. 당시에는 강남이 강북보다 못했으니까요.
Q.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면 현수(권상우) 어머니가 ‘땅값이 오를 거라는 선견지명’으로 말죽거리로 이사 갔는데, 그러고 보니 ‘강남 1970’의 수혜자는 현수 엄마라는 생각도 드네요.(웃음)
유하: 하하하. 저희 어머니는 강남 땅값이 뛸 거라고 생각하고 오신 건 아니고요. 그런데 실제로 그걸 예측한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 같아요. 윗선을 통해 정보를 얻으면 가능한 일이죠.

유하: 많은 창작자가 그렇겠지만 이야기의 모티브는 자기가 보고 느끼는 것에서 오잖아요. 터전이 이 동네이고 그 변화 과정을 30년 동안 지켜보다보니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녹아드는 것 같아요.
Q. 강남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잘 그려낸 영화중에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이 있어요. 연상호 감독님 역시 중학생 당시 강남에서 느낀 내밀한 감정들을 애니메이션으로 구축했죠. 많은 감독들에겐 자라난 지역을 영화로 투영해 보고 싶은 어떤 욕구가 있는 것 같아요.
유하: 뉴욕에서 자란 마틴 스콜세지도 영화(‘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갱스오브 뉴욕’ 등)를 통해 뉴욕의 슬픔과 광기를 자주 얘기했잖아요. 제가 스콜세지를 굉장히 좋아해요. 얼핏 보기엔 조폭 영화지만 그 안엔 자본주의의 본질 같은 게 잘 드러나 있죠. 인간이기 때문에 갖고 있는 비열함, 폭력 이면의 세계를 풍자적으로 그리는 모습이 너무 좋아요.
Q. 감독님에게 강남이라는 곳은… 애증인가요?
유하: 미움과 애착 둘 다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처음 본 강남은 황금빛 벌판이 펼쳐진 드넓은 평야였어요. 논두렁에 정치권의 추악한 욕망이 뒤섞여서 기획부동산처럼 만들어진 곳이 지금의 강남이죠. 제 눈엔 이게 너무 블랙코미디 같은 거예요. 땅 투기를 규제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앞장서고, 사람이 사는 신성한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고, 도덕적으로 자제해야 할 절대 권력이 그걸 가지고 장난을 치고. 그게 지금 강남의 본질 중 하나라고 생각했을 때 한국 사회의 웃지못할 자화상이라고 봤어요. 손정목 씨가 쓴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도 그런 구절이 있어요. “정부가 땅 투기를 하고 시장이 주도하고 시민이 참여했으니 이게 희극이냐 비극이냐”는 구절이요.
Q. 감독님이 판단하기엔 희비극인가요?
유하: 하~(깊은 한숨) 다 있죠.
Q. ‘강남 1970’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하셨는데, 사실 영화라는 것 자체가 가장 자본주의의 양극단에 있죠.
유하: 거기까지는 생각 못해 봤는데 그렇네요. 음, 그런 것 같아요. 시인일 때는 조금 외로워요. 시집은 많이 팔려봐야 10만부예요. 그와 달리 영화는 굉장히 상업적이지만 자본주의 총아로서의 확산력이 있죠. 확산력 속에 제 메시지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작가의 가장 큰 욕망은 자기생각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거거든요. 그건 소설가도 마찬가지고 시인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영화는 확산력이 크기 때문에 조금 덜 외로운 것 같아요.

유하: 제 정체성이 거기에서 뒤틀린 것 같아요.(웃음) 매우 폭력적인 시기에 학교를 다녔어요. 학교는 작은 조폭사회였어요. 그런 환경에서 자라다보니 ‘남에게 호구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강하지 않으면 호구가 되는 모멸감을 느껴야 하니까요. 그게 폭력으로 발현된 거죠. 폭력이 그 사람의 인격으로 치부되던 시절이에요. “너, 쟤 이기니?” 이게 남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암묵적인 힘의 상징이었죠.
Q. 감독님이 상문고 출신이시죠? 상당한 명문고로 알려진.
유하: 저희 때 서울대에 100명이 갔어요. 그런데 그게 명문은 아니지 않습니까.(일동 탄식) ‘하면 된다’의 시절이기 때문에 100명이 갔던 거죠. 지금 학교도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당시엔 선생들이 조폭, 교장은 보스였어요. 사이비 군인이 들어와서 교련 선생이라는 명찰을 달고 애들을 때리던 시절이었죠. 정말 3년 동안 맞은 기억 밖에 없어요. 선생에서 맞고 애들 때리고, 맞고 때리고.
Q. 그래도 맞지는 않으셨네요?
유하: 제가 덩치가 있었기 때문에 주로 때리는 입장이었죠.
Q. 감독님께 맞은 친구들도 어떤 트라우마가…
유하: 그렇죠. 저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셈이에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짐승의 시절을 보낸 것 같아요. 그 기억이 잠재의식 속에 남아서 영화를 만들 때마다 튀어나오는 거죠.
Q. 학교가 키운 건 괴물이기도 하네요.
유하: 네. 종대(이민호)와 용기(김래원)도 살던 곳이 철거되는 바람에 졸지에 밖으로 나와서 괴물이 됐죠. 어떻게 보면 ‘강남 1970’은 괴물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Q. 괴물들을 키워 낸 대한민국.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약간은 나아졌다고 보시나요.
유하: 우리 사회가 얼마나 나아졌을까요. 저는 굉장히 절망적입니다. 그래서 이런 영화를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은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가르는 시스템이 너무 견고해져 버렸어요. 시스템을 거스르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어떤 가능성들이 너무 줄었죠. 쉽게 쓰이다가 버려지는 게 비정규직이기도 하고…

유하: 글쎄요. 저는 5공 때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대략 아시겠죠? 정말이지, 4년 내내 최루탄 냄새를 맡고 다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가끔은 우리 세대가 왜 이렇게 보수화됐는지 신기하기는 해요. 저요? 저는 3강 오륜을 따지는 사람이라 보수적일 때도 있죠. 하지는 그걸 떠나서 양심적인 지성인으로 살고 싶은 게 제 마음이입니다. 양심을 100% 지키면서 살아가기는 어렵잖아요? ‘지갑이 형님’이기 때문에. 하지만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고 살자’는 생각은 항상 합니다.
Q. 감독님은 종대와 용기 중 누구에게 더 이입이 되시나요?
유하: 개인적으로는 용기 쪽에 더 이입이 돼요. 유사 가족에 편입된 종대는 가족을 잘 살게 하려는 마음은 있지만 큰 욕망에 불타오르는 인물은 아니에요. 반면 용기는 자기 욕망에 솔직하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크게 하다보면 ‘비열한 거리’와 유사해지니까 조금 누른 부분이 있어요. 무엇보다 땅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어요. 땅이 돈보다 훨씬 관념적이라 그리기가 쉽지는 않더라고요.
Q. 영화를 만드는데 시인으로 활동했던 경험들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나요.
유하: 꽤 미치는 것 같아요. 뭔가 더 유치해 지거나, 더 웃기려는 상황 앞에서 브레이크를 걸어줘요 ‘관객 100만 명이 덜 들더라도 최소한의 격은 지켜야 하지 않나’ 생각하는 거죠. 사실 시인일 때는 세상 눈치를 안 봤어요. 어떻게 보면 감독은 저잣거리에 있는 거고, 시인은 산 중에 있는 거니까요. 시인으로 살 때는 기자들과 얘기할 때도 가감없이 했어요. 잃을 게 없으니까. 그런데 감독은 제 돈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많은 것들이 얽혀 있잖아요. 쇼비즈니스적인 균형 감각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시인의 자아와 늘 충돌해요.
Q. 시인에서 감독이 된 건, 운명일까요?
유하: 중학교 때 장래희망이 영화감독이었어요. 그때 ‘십계’라는 영화를 보는데 앤 백스터라는 여배우가 참 예뻤어요. 찰톤 헤스톤과 사랑이 안 되는. 사춘기 때 그 배우를 보고 한 달 동안 식음을 전폐한 적이 있어요. 너무 보고 싶어서. ‘대체 이 양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 할리우드에 가서 감독이 돼야겠다’ 14살 때 그런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사람이 죽어 있더라고요. 왜 우리가 보는 별은 몇 억 광년 전에 죽은 별이잖아요? 이게 바로 ‘스타’구나, 그런 깨달음을 그때 얻었죠.(일동 웃음)
Q. ‘강남 1970’을 끝으로 거리 3부작은 마무리가 됐습니다. 다음 스탭이 궁금하네요.
유하: 이 영화가 제 영화의 어떤 40대까지의 방점인 것 같아요. 이젠 ‘톤 앤 매너’가 다른 영화를 찍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또 강남이냐고요? 글쎄요.(웃음)
Q. 그나저나 엄정화 주연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1)를 통해 여성적인 것에 대한 뛰어난 감식안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후 다소 마초적인 액션영화들을 만들면서 여자를 모르는 감독이라는 어떤 편견을 듣고 계신데, 억울하지 않으세요?
유하: 억울하기 보다는, 사실은 저도 여배우의 매력이 잘 드러내는 영화를 찍고 싶었는데, 어떻게 영화가 그렇게 흘러가더라고요.
Q. 마지막 질문입니다. 결혼은 정말 미친 짓인가요?
유하: 결혼은 해도 미친 짓, 안 해도 미친 짓입니다.(웃음)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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