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분에 MBC 드라마 의 은수는 아직도 낙원상가 어디쯤에서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손톱 끝까지 태주(에릭)를 사랑하게 됐다고 고백하는 은수는 사랑 한 번 못해봤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당당하고 사랑스럽다. 동생의 병원비를 마련해야 하는 생계에 시들다가도 태주와 손잡고 걷는 잠깐의 산책에 다시 반짝거리는 은수는 누구나의 마음속에 있는 떨림을 되살려냈다. “제가 이런 말 하는 건 좀 그렇지만 은수는 계속 거기서 살고 있을 거 같아요. 물론 기술적인 부분에서 그 때 연기를 훌륭하다고 할 순 없지만 캐릭터가 제가 아니라 그냥 은수로 보이는 게 되게 귀엽던데요. (웃음) 지금도 그때처럼 연기할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어요. 연기는 할수록 어렵고 잘 모르겠지만요.” 20편이 넘는 영화를 찍으며 점점 길어지는 필모그래피만큼 연기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때마다 정유미는 영화를 본다. 그리고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고 깨끗해진 마음”으로 다시 촬영장으로 향한다. 다음은 정유미의 마음을 비워주는 동시에 생생한 디테일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 영화들이다.

2005년 | 스기이 기사부로
“(이)민기가 추천해서 봤는데 진짜 감동 받았어요. 사실 동물들이 나오는 유치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사람의 본질적인 걸 건드린 거 같아요. 늑대와 염소의 관계나 행동들이 애니메이션인데도 디테일이 생생하게 살아있구요. 특히 처음에 둘이 친구가 되서 산에 올라가는데 포동포동한 염소의 궁둥이를 보고 늑대가 맛있겠다면서도 친구를 위해 욕구를 참는 게 귀여우면서도 뭉클하더라구요. 우리는 친구나 가족처럼 옆에 있는 것에 대해 잊고 살 때가 많은데, 그런 걸 떠올리게 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염소고기가 아닌 염소를 좋아하는 늑대, 가브. 늑대를 두려워하진 않는 염소, 메이. 친구 사이인 이 둘은 이야기도 잘 통하고, 공통점도 많다. 하지만 서로가 먹잇감이거나 천적인 늑대와 염소의 오랜 법칙은 둘의 우정을 가만 놔두질 않는다. 메이를 보고 군침이 도는 걸 참을 수 없는 가브뿐 아니라 서로의 집단에서도 둘의 사이를 반대하는데. 이 둘, 그냥 사랑할 수 있을까?

2006년 | 호소다 마모루
“전 작품을 준비하면서 거기에 도움이 되는 영화를 보기보단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는 편이에요.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면 비워지고 깨끗해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좋은 영화라고 해서 거기에 나온 감정을 흉내 내거나 따라할 순 없으니까요. 그것보다는 애니메이션이나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나가면 그 깨끗해진 기운 때문에 현장의 상황들을 탁탁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아요. 도 그래서 여러 번 봤어요. 그리고 어쩜 캐릭터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지 정말 사람 같아요. 눈빛이나 행동의 디테일을 어떻게 그렇게 살려냈을까요?”
흔히 질풍노도라고 하는 십대의 소년, 소녀들에겐 때론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진다. 환상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기도, 미래로 혹은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기도 한다. 마코토 역시 우연히 주어진 타임리프 능력을 이용해 친구의 짝사랑을 도와주기도, 지각을 막기도 한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야하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처럼 타임리프의 유효기간도 얼마 남지 않으면서 즐겁기만 하던 마코토의 일상도 달라진다.

2007년 | 하라 케이이치
“은 진짜 웃겨요. (웃음)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여기에 나오는 여동생 캐릭터는 한 번쯤 써 먹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워요. 에도시대의 화석 같은 갓파 쿠가 우연히 한 가족과 함께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인데, 그중에서 막내 여자아이가 너무 귀여운 거예요. 사실은 주변의 모든 게 다 궁금한데, 사람들 앞에선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척 하고. 그럴 때 짓는 표정이나 행동이 너무 귀여워요. 좀 어릴 때 저런 캐릭터 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죠. (웃음)”
애니메이션이라고 해서 늘 아이들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은 우연히 전설 속의 요괴인 갓파와 여름방학을 보내게 된 고이치 가족의 일기다. 그 일기 안에는 소년과 갓파의 우정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과 언론의 천박함, 문명의 잔인함까지 묵직한 주제들이 얽혀있다. 귀여운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고어를 남발하는 갓파에게 웃음 짓다가도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현실과 마주하게 될 때면 결코 마음이 가볍지 않다.

2007년 | 숀 펜
“는 제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있는데 어떻게 설명해야할 지 잘 모르겠어요. 좋은 걸 말로 설명하기 힘들달까요? (웃음) 일단 남자였음 좋겠단 생각이 처음 든 영화예요. 영화의 주인공처럼 모든 걸 버리고 훌쩍 여행도 떠나고 싶고. 풀밭에서 자고, 히치하이킹 하고, 낯선 곳에 가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진짜 나를 찾아서, 내가 보고 싶은 걸 찾아서 떠나는 거요. 처음 봤을 땐 좀 심심하다고 느꼈는데, 최근에 다시 보니까 좋더라구요. 언제 어떤 상태에 보는가에 따라서 같은 영화라도 느낌이 다 다른 거 같아요.”
누구나 일상을 벗어난 여행을 꿈꾼다.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전제로 한 잠깐의 일탈. 그러나 크리스토퍼(에밀 허쉬)는 진짜 자신의 제 자리를 찾아 길을 나섰다. 세속적인 성공이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알래스카로 가기 위해 자연에 몸을 맡긴 크리스토퍼에게서 무엇을 발견하든 당신의 일상은 조금 달라질 것이다.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의 실화가 명배우 숀 펜의 연출에 의해 영상으로 옮겨졌다.

1997년 | 이창동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유명한 영화니까 봤는데, 캐릭터도 그렇고 얘기도 그렇고 너무 감동이었어요. 가 나왔던 시대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때 나왔던 영화들은 좀 달랐던 거 같아요. 뭔가… 정말 영화답달까요? 문성근 선배님, 심혜진 선배님 등 나오신 분들이 다 너무 대단하셨죠. 연륜에서 나오는 것도 있겠지만 그 밀도가… 정말 충격이었어요.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배우들의 연기가 부담스럽지 않고 영화 안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데, 아 연기는 내가 할 게 아닌가봐 하면서 좌절하기도 했어요. (웃음)”
별 볼일 없는 청춘 막동(한석규)은 클럽의 가수 미애(심혜진)와 얽히면서 태곤(문성근)의 조직에 들어가게 된다. 그저 군대를 막 제대한 애송이였던 막동의 인생은 점차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선회한다. 이리저리 치이면서 변해가는 막동의 모습과 함께 개발에 피로한 당시 한국의 모습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낯설지 않다. 과 를 통해 완성형에 가까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 소설에서 영화로 방향타를 바꿔 든 감독의 날 선 시절이 느껴진다.

“오래 연기한 배우는 아니지만 예전에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만큼 저 자신도 저한테 기대가 좀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연기 잘 하시는 분들 보면 그저 대단하고, 어떻게 저렇게 하지 감탄하기 바빠요. 아직은 연기를 잘 모르고 싶다고 얘기하고 다녔더니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텅텅 빈 거 같아서 겁나요. 이제는 연기, 좀 알고 싶어요. (웃음)” 그러나 너무 겁먹지 말길. 모두에게 너무 친절해서 남자친구의 속을 뒤집는 채현()이나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갖은 진상을 부려도 사랑스러운 인영()을 그녀 말고 누가 할 수 있을까? 정유미가 구하는 답은 이미 그녀 안에 있다.
글. 이지혜 seven@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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