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용은 어릴 때부터 망치를 들고 못질하는 것을 비롯해 무엇이든 두드리고 때리는 걸 좋아했다. 5~6살 때까지 식사시간마다 젓가락으로 네모진 식탁을 때려 그의 자리엔 홈이 파여 있을 정도. “밥그릇이나 식탁을 때리면 나는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안성용) 집안에서는 막내라 다들 챙겨주었지만 학교는 다른 세상이라 스트레스였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아이들을 장난치듯 괴롭혀 왕따를 당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면서 상처를 받았죠. 공부보다 종이접기나 무언가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아이들이 도망갈 정도로 많이 때렸던 것 같아요.”(안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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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용의 어릴 때 꿈은 전기기술자였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음악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초등학교 졸업 직전에 부모님이 이혼해 가족이 흩어져 삼형제는 큰 집에서 살았다. 큰아버지와 큰 어머니는 친자식처럼 대해줬지만 정상적이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음악은 탈출구가 되었다. 강화중에 들어가 풍물 반에서 꽹과리를 치는 상쇄를 했다. “꼬리를 물면서 관객들 사이를 누비며 돈 받는 재미가 쏠쏠했죠. 학교축제에서는 아줌마들이 만원 지폐를 찔러주기도 해 신이나 인사만 5번 계속해서 15만원을 번적도 있습니다.(웃음) 그땐 풍물반만 있는 줄 알고 지원했는데 2학년 때 강화의 옛날 이름인 4인조 밴드 ‘갑비고차’ 4기로 활동했습니다.”(안성용) 음악을 찾아 듣지는 않았던 그는 큰 형에게 시나위의 ‘써커스’, ‘은퇴선언’을 추천받았는데 멜로디가 너무 좋았지만 김바다 창법이 어려워 포기했다.
그의 둘째형 안성인은 직접 그린 ‘노인과 바다’ 그림이 신문에 날 정도로 강화에서 유명했다. 둘째 형 친구 심현성은 강화중학교 밴드부 갑비노차의 1기 선배다. “강화고에 다니던 그 형이 어느 날 밴드부로 찾아와 드럼을 치는데 완전 멋있어 배우고 싶었지만 밴드부에서는 워낙 무서운 선배라 어깨너머로 구경만 했죠. 제 작은형은 당시 강화에서 싸움 왕으로 유명한 남분식파 회장급이었어요. 그걸 안 밴드부 선배들이 저를 많이 챙겨줬습니다.(웃음)”(안성용) 밴드부 입단 초기에 선배들이 무서워 드럼 연주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그는 스트로크 타법으로 매일 드럼을 치다보니 손가락에 피가 터졌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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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용 20살때 갑비고차, 아젠다 연합 밴드로 시절 강화도 타종식 행사때 공연
졸업을 앞두고 밴드부 친구들 대부분 대학진학을 준비했지만 공부도 못하면서 큰아버지에게 손 벌리기가 부담스러워 진학을 포기했다. 그래서 막 생겨난 인천시 주안에 있는 폴리텍 대학에 들어가 직업위탁교육을 받으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년 공부하고 승강기 자격증을 땄지만 일자리가 없어 자동차 프라모델 전시하는 회사 ‘오리엔탈 전공’에 취직했다. 열심히 직장에 다녔지만 드럼을 치고 싶어 큰 형에게 전화해 “왜 이러고 사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했다. “직장을 그만두려고 해도 생계가 걱정되었죠. 그때 제 인생의 구세주인 형이 도와주겠다며 음악하고 싶으면 일 그만두고 하라고 말해주더군요. 그날 바로 사표를 쓰고 나왔습니다.”(안성용) 과감하게 회사를 그만 둔 안성용은 큰 형 안성진의 추천으로 밴드 써드스톤의 드럼으로 영입되어 본격적으로 음악생활을 시작했다.(part5계속)
한두수, 박상도, 안성용(왼쪽부터)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사진제공. 안성용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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