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현주가 영화 '실낙원'으로 돌아왔다. / 사진=텐아시아DB
배우 김현주가 영화 '실낙원'으로 돌아왔다. / 사진=텐아시아DB
"영원한 건 없죠. 연상호 감독님과 영원히 함께 간다는 계획도 없어요. 하지만 제 안의 다른 면을 봐주고, 안정형이라 도전을 망설이는 저를 당겨주시는 분이라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연상호 감독과 어느덧 네 번째 작품을 맞이한 소회에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배우 김현주의 눈빛에는 30년 차 베테랑다운 뚝심과 유연함이 공존했다. 넷플릭스 '지옥' 시즌 1·2, 영화 '정이'에 이어 네 번째로 연 감독과 손잡은 그는 '실낙원'에서 AI 아들이 주는 위안에 기댄 채, 살아 돌아온 진짜 아들을 마주하고 흔들리는 엄마의 위태로운 내면을 밀도 높게 표현했다.

지난 16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실낙원'(감독 연상호) 개봉을 앞둔 김현주를 만났다. 이달 21일 극장 공개되는 '실낙원'은 9년 전 캠핑스쿨 버스 실종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엄마 류소영(김현주 분)에게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선우(배현성 분)가 살아 돌아오며 벌어지는 미스터리 심리 스릴러다. 14회차라는 짧은 일정으로 완성된 저예산 작품으로, 김현주는 숨 막히는 긴장감과 날 선 심리 변화를 스크린 가득 채웠다.

"시나리오를 받고 몇 달 만에 바로 촬영에 들어갔어요. 준비 기간이 길지 않았던 덕분에 오히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의 날것 같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었죠. 압축적으로 감정을 쏟아붓는 방식이 이 영화와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실낙원'에서 김현주는 AI 프로그램 속 아들과 9년 만에 살아 돌아온 아들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엄마를 연기했다. / 사진제공=CJ ENM, WOWPOINT
'실낙원'에서 김현주는 AI 프로그램 속 아들과 9년 만에 살아 돌아온 아들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는 엄마를 연기했다. / 사진제공=CJ ENM, WOWPOINT
극 중 류소영은 AI 프로그램으로 구현된 아들에게 의지하며 버티다, 진짜 아들이 돌아온 뒤 도리어 혼란과 공포를 겪는다. 김현주는 이 복잡한 모성을 '집착과 중독'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봤다.

"단순히 숭고한 모성애라기보다 아들에 대한 집착이자 중독에 가깝다고 봤어요. 아들을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소유물'로 여겼기에, AI 아들에게 더 쉽게 빠져들 수 있었던 거죠. 그래야 진짜 살아 돌아온 아들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낯섦과 충격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물의 선택 자체가 정당했다고 하고 싶진 없지만, 인물을 표현하는 배우로서 소영의 결핍을 충분히 이해하려 애썼어요."

작품의 무게감과 달리 현장은 즐거웠다. 연상호 감독과의 네 번째 호흡에 대해 그는 "가벼운 농담만 했다면 지겨웠을 텐데, 감독님의 똑똑함에서 비롯된 유머는 재밌다. 저뿐만 아니라 배우들을 신뢰하면서도 드러내지 않는 점이 멋있다"고 치켜세웠다.
영화 '실낙원'에 출연한 배우 김현주. / 사진제공=CJ ENM
영화 '실낙원'에 출연한 배우 김현주. / 사진제공=CJ ENM
오랜만에 극장가로 돌아온 만큼, 달라진 극장 팬서비스 문화는 김현주에겐 낯설지만 신선한 즐거움이다. 그는 "한 팬은 종이에 '야, 너 내가 야라고 하지 말랬지?!'라고 적어서 연기톤으로 읽어달라고 하더라. 그게 뭔지 아시냐. 유행이냐"며 취재진에게 되물어 현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요즘은 왜 이렇게 유행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훠궈 먹는 것도 유행이고 젤리 먹는 것도 유행이래요. 현장에서 20~30대 친구들이 '선배님, 요즘 이거 유행이에요. 드셔보세요'라며 권하는데 도저히 속도를 못 따라가겠어요. 하하. 하지만 제가 이해 못하는 그 자체도 재밌어요. 또 제가 해주면 팬들이 좋아하잖아요. 찾아와준 건데 해줘야죠. 저 역시 막상 하다 보면 즐겁고 재미를 느껴요."
영화 '실낙원'에 출연한 배우 김현주. / 사진제공=CJ ENM
영화 '실낙원'에 출연한 배우 김현주. / 사진제공=CJ ENM
1996년 데뷔해 30년간 쉼 없이 달려온 김현주는 내년이면 50세를 맞이한다. 그는 "요즘 숫자가 싫다"며 웃어 보이면서도 지나온 세월을 담담히 반추했다. 그는 "돌아보면 그 시절엔 사색보다 쓸데없는 고민과 자책을 많이 했어요.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하고 연기하는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 머리 대신 몸을 쓰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어요. 악기를 다루거나 도예를 하는 등 손으로 직접 할 수 있는 활동들을 했죠. 작품이 끝나면 여행을 통해 무조건 비워내는 연습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캠핑이라는 취미도 자연스레 생겼어요. 캠핑이 제 삶을 건강하게 환기시켜 줍니다. 자연 속에서 가만히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으면 무뎌졌던 오감도 깨어나고 복잡했던 생각도 비워져요."

변함없는 동안 비결을 묻자 그는 "과하게 손대지 않고 내 얼굴 자체를 받아들이는 게 답"이라며 "생각보다 철이 든 편인데, 그걸 계속 가져가고 싶다"고 미소를 지었다.

흥행에 대해 묻자 "솔직히 자신 없다"며 호탕하게 웃은 김현주는 관객들에게 결론 대신 물음표를 품고 돌아가는 영화가 되길 바랐다. "배우로서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쏟아부었고 이제 제 손을 떠났죠. '실낙원'은 정답을 찾기보다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사색하게 만드는 영화예요. 관객 각자의 마음속에서 저마다의 답을 길어 올리는 사색의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김지원 텐아시아 기자 bella@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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