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간단한 계산도 못해 장인어른인 이순재에게 맞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그가 상상 속에서 장인어른의 어떤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살고픈 래퍼 ‘슈퍼 쥬얼리 정’을 연기하는 모습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며 우울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라야 자신의 말을 꺼낼 수 있는 인생이란 얼마나 답답한 것일까. 그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랩을 하기 전까지 수많은 일이 있었을 것이고, 그는 그 때마다 하고 싶은 말들을 꾹꾹 참고 눌러왔을 것이다. 그래서 정보석은 의 그를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뭘 하든 자기가 잘 안됐다는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뭐든 속에 담은 말 안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정보석은 그렇게 사람들의 내면에 감춰진 슬픔과 고민을 찾아내며 지난 25년을 차분하게 걸어왔다.
그를 스타덤에 올린 1986년의 사극 에서 출생의 불안에 떠는 남자를 연기할 때도, 에서 학생운동 시절을 잊지 않으려 하는 소심한 교사가 될 때에도 그는 “캐릭터의 외형이 아닌 사람의 내면”을 잡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정보석이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것은 인간을 파고드는 그의 고민의 값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의 정보석처럼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습관에 몸을 던진다. 하지만 “나는 갈수록 내 연기가 늘 것이라고 믿는다”는 정보석은 나이 들수록 연기에 대해 깊이 고민하면서 20대 청춘보다 더욱 생생하게 살아있는 배우의 인생을 보여준다. 그가 마흔이 넘어 출연한 드라마 과 에서 위태로운 남성의 내면을 깊게 파고 들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의 연기가 도착한 어떤 경지다. 그래서 늘 청춘처럼 고민하면서 중년의 깊이를 더하는 그에게 자신의 청춘을 성장시켜준 영화들에 대해 부탁했다.

1984년 | 세르지오 레오네
“이 작품 이전의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영화들은 화면의 스펙터클이 부각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작품은 그걸 넘어서서 인간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대해 관조하는 듯한 시선이 인상적이었어요. 제임스 우즈하고 로버트 드니로가 어렸을 때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나는 데, 그 짧은 순간 제임스 우즈가 로버트 드니로가 노렸던 시계를 빼앗잖아요. 그리고 거기서부터 제임스 우즈는 결국 로버트 드니로가 원했던 것들을 가져가죠. 그 짧은 순간에 둘의 관계와 인생을 보여주는 게 너무 좋았어요.”
와 함께 갱스터 영화의 교과서로 손꼽히는 작품. 금주령이 내려진 시절 미국의 갱스터들을 그려내면서 인간의 인생을 총체적으로 담아낸다. 의 ‘갱스 오브 뉴욕’편에서 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패러디할 만큼 영화적 내용뿐만 아니라 독특한 분위기로도 사람을 압도한다. 엔니오 모리꼬네가 만든 메인 테마 역시 영화와 함께 클래식의 반열에 올랐다.

1976년 | 마틴 스콜세지
“배우의 비주얼 때문에 특히 더 좋아하는 작품인데, 로버트 드니로가 가장 로버트 드니로 적인 연기를 보여준 게 라고 생각해요. 가 로버트 드니로가 보여준 메소드 연기의 절정이라면, 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표현주의적인 연기를 보여줘요.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해 굉장히 많은 장치를 사용하죠. 사실 그 장치들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데 로버트 드니로였기 때문에 그게 다 사실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에서 정말 굉장한 연기였어요.”
와 더불어 마틴 스콜세지-로버트 드니로가 빚어낸 또 한 편의 걸작. 월남전의 충격을 안고 미국으로 돌아온 한 택시 기사를 통해 1970년대 미국의 사회상을 조망한다. 정보석의 말대로 한 가운데에만 머리를 남긴 로버트 드니로의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타인에게 이해받기 어려운 그의 행동 등 인상적인 이미지가 많이 남아있는 작품이다.

1967년 | 마이크 니콜스
“은 영화가 가진 드라마 때문에 좋아해요. 요즘은 조금 다르지만, 결국 우리는 사랑 앞에서 모두 여린 사람들이잖아요. 첫 사랑을 만났는데 손잡는데 6개월, 뽀뽀하는데 1년 반씩 걸리기도 하고. 비오는 날 같이 우산이라도 쓰면 팔이라도 몇 번 잡아보려고 노력도 하고. 에는 그런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시절 더스틴 호프만만이 할 수 있는 연기였다고 생각해요.”
중년의 영화 팬들에게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와 함께 기억에 남아 있는 작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국내에서도 수 없이 패러디 될 만큼 깊은 인상을 남겼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한 청춘이 중년의 여인과 불륜 관계에 빠지고, 다시 그녀의 딸을 사랑하는 내용은 지금도 충격적이지만, 은 그것을 청춘의 성장기로 풀어내는 활력을 갖고 있다.

1984년 | 배창호
“배창호 감독이 가장 물이 올랐을 때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에너지가 가장 충만할 때 만들었던 작품 같아요. 한국 영화의 수준을 업그레이드 시킨, 한국 영화에 어떤 고급스러운 느낌을 부여한 작품 아닌가 싶어요. 화면 구성부터 연기까지 모든 게 최고였는데, 특히 장미희 씨와 안성기 씨의 연기가 좋았어요. 두 분이 사람의 본능적인 욕망을 파고드는데 단지 에로틱한 느낌이 아니라 꼭 내 내면의 본능을 탐구하듯이 연기하는 게 너무 기억에 남아요.”
미국에서 시민권을 따서 가족을 불러들이려는 남자와 미국에서 혼자 사는 여자가 계약 결혼과 이혼을 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각적인 영상으로 잡아낸 1980년대 한국 영화의 수작이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모든 촬영을 미국에서 진행해 큰 화제를 모았고,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모범적인 배우로 인식되는 안성기가 건달 같은 남자를 연기하며 그의 작품 중 최고 수준의 연기를 보여준다.

1974년 | 가이 해밀톤
“어렸을 때 봤던 영화에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았는데, 그 때 거의 처음 본 영화였던 거 같아요. 이 작품을 보면서 굉장히 영화적인 충격을 받았어요. 영화를 잘 접하지 못했는데 를 보면서 영화란 건 판타지라고 생각하게 됐으니까요. 영화는 뭐든지 가능하다고 믿게 만든 작품이었죠.”
최근의 과 로 보다 현실적인 느낌을 갖게 된 007 시리즈지만, 과거의 007 시리즈 중 많은 작품은 상상을 초월하는 신무기를 가진 007이 슈퍼 히어로처럼 활약을 하기도 했다. 는 바로 그런 작품 중 하나로, 007이 말 그대로 ‘세계 정복’을 노리는 악당과 싸우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정보석의 눈에는 정말 영화가 곧 판타지라는 것을 믿게 해준 영화였을 듯.

글. 강명석 two@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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