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르로 정의되는 음악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냐마는, 그 가운데에서도 가수 수란의 음악은 상당히 독특하다. 보컬에서는 흑인 음악의 냄새가 나는데, 도처에서 일렉트로닉 소스가 튀어나온다. 댄서블한 팝 같다가도 힙합의 스웨그가 느껴지기도 한다. 레퍼런스를 추측하기는커녕, 바로 다음 음(音)조차 예측할 수 없다. 한마디로, 별종이다.
인터뷰를 통해 만난 수란은 확실히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으로 시작한 말은 “제가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로 끝났다. 수줍음을 타면서도 할 말은 다 하더란 거다. 솔직함. 그것은 가수 수란과 인간 신수란 모두에게 주효한 매력이었다.
Q. 당신이 처음 미디어의 주목을 받게 된 건, 김예림 ‘아우(Awoo)’ 작곡에 참여하면서였다. ‘미녀 작곡가’로 소개되던데, 기분이 어땠나? 수란 : 부담스러워서 그 뒤로는 집 밖에 나가질 못했다(웃음). 진짜 예뻤으면 “아~ 좋다!” 했을 텐데, 그게 아니어서. 하하하.
Q. 첫 앨범은 작년에 발표했지만, 그 전부터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들었다. 수란 : 음악을 늦게 시작했다. 원래는 공대생이었는데, 22~3세부터 음악을 했다. 재즈 라이브 클럽에서 공연했던 게 본격적인 시작이었지. 홍대나 압구정 등지에서 밴드활동하며 노래를 했다. 그런데 또 그 분야가 깊이 들어가려면 워낙 공부를 많이 해야 하지 않나. 3~4년 쯤 활동하다가 내가 원하는 방향과 100% 일치하지는 않아서 다른 길을 모색했다. 그러다 한 프로듀서 분을 만나서 2년 정도 작업을 했지. 그 때 했던 게 영국음악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잘 안 됐지만 내 음악을 찾는 데에는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그러다 학교(서울예대)에도 들어간 거고.
Q. 혹자는 한 우물만 파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고도 한다. 수란 : 내가 무언가에 빠져 들면, 그걸 빨리 흡수하는 편인 것 같다. 그리고 배움의 과정에서 정체기를 잘 못 견디는 것도 같고. 다른 거 배울 게 있나, 하며 찾게 된다. 그런데 그게 합쳐지니까 내 나름대로의 소신이나 음악 철학이 생기면서, 무언가 내가 원하는 게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서 좋더라. 그러니까, 지금은 되게 좋다. 으허허.
Q. 지난해 발매한 ‘아이 필(I feel)’도 그렇고 이번 앨범 역시 한 가지 장르로 규정되지 않는다. 알엔비, 팝, 일렉트로니카 등 여러 요소가 섞여 있는데, 다양한 음악 씬을 경험한 게 영향을 준 건가? 수란 : 그러지 않을까. 워낙에 내가 ‘다중이’이기도 하고. 하하하.
Q. ‘다중이’? 다중 인격 말인가. 수란 : 앨범을 내면서 프라이머리 오빠한테 한 줄 평을 부탁했는데 ‘다중음격’이라고 하더라. 일리 있는 말 같다. 빈지노는 “수란의 목소리는 흰색이다. 어떤 색과도 어울릴 수 있다”고 해줬는데 그 역시 맞는 말 같다. 어떤 부분에서는 곡에 목소리를 맞추려고 하는 성향도 있고, 그 안에서 장점을 파악하는 걸 좋아하거든. 긍정적으로 음악을 대하니까, 여러 가지가 다양하게 흡수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큰 범주로 보자면 내 음악은 보컬에 기반을 둔 곡이라서, 소울음악이 맞는 것 같다.
Q. 의외다. 워낙 작곡가로 먼저 알려지기도 했고, 이번 앨범도 전형적인 보컬 위주의 곡이라기보다는 사운드 디자이닝에 신경을 쓴 티가 났거든. 수란 : 그렇게 들어줬다면 정말 감사하다. 나도 음악을 디자인한다는 느낌으로 작업에 임하거든. 장면을 먼저 생각하고 악기도 장면의 이미지에 맞는 소스들을 골라서 넣었다. 이를 테면 ‘콜링 인 러브(Calling in love)’는 햇살이 쏟아지는, 꾸밈없는 자연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신디사이저를 왜곡시켜서 햇살이 쏟아지는 느낌을 주려 했고, 빈지노의 랩도 점점 빌드 업시키면서 찬란한 느낌, 달려가는 느낌을 만들려고 했다.
Q. 이미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얼마 전 발매된 이규호의 ‘노썬 라이츠(Nothern Lights)’도 전자음을 왜곡시켜 시각적인 이미지를 준 노래다. 그런데 그 노래는 누가 들어도 오로라의 느낌이라면, 이 곡은 그렇지 않은 것 같거든. 혹시 전달하고자 하는 이미지, 정서나 있나? 소란 : 내가 바라는 바를 정해놓지는 않았다. 그냥 느낌, 감정적으로 전해지길 바란다. 자연의 이미지가 단순히 자연의 풍경으로 떠오르는 게 아니라, 힐링이 된다거나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은 감정적인 것들로 녹아들었으면 좋겠다. 이를 테면 연애 중인 사람은 연인이 떠오를 수도 있고, 혼자인 사람도 아무 일 없이 기분이 좋아질 수 있겠지.
Q. 예전 인터뷰에서 ‘내 음악은 듣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던 게… 수란 : 맞다. 이런 맥락이다.
Q. 2월에 나올 미니앨범에서는 좀 더 다양한 정서의 노래가 담길 수도 있겠다. 수란 : ‘아이 필’ 같은 곡도 있고, 좀 더 모던한 곡도 있고, 진짜 발라드도 있고. 다양한 것 같다. 내 보컬에 다른 옷을 입히는 느낌으로 작업하려 한다.
Q.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정서는 무엇인가? 수란 : 딱 집어서 말할 수가 없다. 내가 진짜 ‘다중이’인가봐. 재밌는 것도 좋아하고 푼수 같은 면도 있는데 또 비현실적인 음악을 좋아할 때도 있다. 가끔은 유쾌한 내가 있고, 가끔은 심각한 나도 있고, 그렇다.
Q. 곡에 자신의 성향을 많이 투영하는 편인가? 수란 : 자연스럽게 가는 거 같다. 가끔 포장을 하고 싶으면 포장해서 내가 원하는 이미지로 보여줄 수도 있고 진짜 나를 보여줄 수도 있고.
Q. 배우들은 배역과 스스로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서 캐릭터를 완성시킨다고도 하잖아. 당신은 어떤 식의 과정을 거쳐서 스스로를 표현하나? 수란 : 배우들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이미지를 생각해서 콘셉트를 잡고, 프로듀싱을 먼저 둔 다음에 스토리를 찾아가는 편이거든. 그 모습이 지금 당장의 내가 아닐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인 그림을 잡아서 거기에 맞는 나를 끌어내서 포장해 담는 것 같다. ‘다중이’처럼. 하하하.
수란
Q. 가장 많은 영감을 주는 매체는 무엇인가? ‘콜링 인 러브’처럼, 이미지인가? 수란 : 그림이나 영상일 때도 있고 영화일 때도 있고. 음악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는데 좀 더 원초적인 음악일 때도 있다. 레퍼런스를 잘 안 잡고 작업하거든. 그래서 편곡이 약간 ‘뭐야 이거?’하게 될 수 있는데(웃음), 워낙 재밌는 걸 좋아한다. 가끔은 아예 의외의 것에서 감성을 따와서 요즘 감각으로 작업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이 필’의 코드 진행은 차가운 하우스 트랙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 안의 감정이 모던하고, 슬픔과 기쁨이 뚜렷하지 않고, 도시적인 느낌이잖아. 그 느낌의 코드를 따서 거기에 소울적인 보컬을 입히니까, 너무 재지하지 않으면서도 모던한 소울이 나오는 것 같더라.
Q. 그런데 새로움을 추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함정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 정말 ‘새로움’만 찾고자 하는. 수란 : 가끔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새로운 게 안 느껴지면 어떡하지?’라는. 지금은 마음을 편하게 먹은 게, 어떤 모습이든 그게 나 자신인 것 같더라. 하다 보면 한 장르가 좋아서 그것만 할 수도 있는 거고. 어떻게 해도 그게 내 성향 아니겠나. 새로움에 대한 걱정은 되도록 안 하려고 한다.
Q. 또 궁금한 점은 바로 가사다. 사운드에서 오는 정서가 있으니까, 반대로 가사에는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을 거란 생각도 했거든. 수란 : 가사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진짜 내 얘기면 담을 때 문제가 안 되는데, 묘사를 한다거나 상황을 만들 때는 가사가 공감을 사는 게 중요하다. 더불어 일상적인 단어, 새로운 표현을 넣고 싶다. 연기하듯 부르기 위해. 그래서 이번 신곡에도, 말도 안 되지만 “쭈우”라는 표현을 넣기도 했다.
Q. 비교를 하자면, 이런 음악에는 서사에 집중한 가사보단 멜로디를 잘 살려주는 발음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수란 : 그치. 발음도 중요하다. 자칫하면 느낌적인 느낌이 사라지니까. 또 발음만 생각해서 쓰다보면 서사적인 부분에서 부족함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발라드 넘버는 가사를 먼저 쓰기도 하니까, 서사적인 가사는 그런 곡에서 보여주면 되지. ‘콜링 인 러브’는 이미지의 음악이라서 어쩔 수 없다.
Q. 가사의 재료는 어디에서 얻나? 수란 : 사운드의 패턴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를 들어 ‘콜링 인 러브’의 경우는 꿈과 현실을 오가는 편곡을 반영했다. 그리고 들어보면 전화 벨소리(실제 전화벨 소리가 아니라 소스를 왜곡시켜 만든 소리)가 등장하거든. 거기에서 ‘어? 전화? 그러면 콜링 인 러브, 사랑을 찾아가는 표현이 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시작해 편하게, 가볍게 접근했다.
Q. 빈지노와의 작업은 어땠나? 한국어 가사를 잘 쓰기로 정평이 나 있는 래퍼다. 수란 : 랩 구간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노래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랩으로 하면 리듬도 많이 쪼갤 수 있고 가사에도 스토리를 더 넣을 수 있으니까. 감각적인 언어로 사랑스러운 스토리 하나를 넣어주면 정말 꿈결 같겠다고 생각했다. 플로우나 느낌도 중요한데, 그 점에 있어서 빈지노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신의 한 수!
수란
Q. 얼마 전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아이 필’을 꼽았더라. 수란 : 한 곡으로 나를 알리고 싶다면 뭘 소개하고 싶냐는 질문이었다. 지금 내가 시작 단계에 있으니까, 그 곡을 들으면 ‘얘가 이런 스토리로 시작하고 있구나’라고 알아봐주지 않을까 생각한 거지.
Q. 나를 소개하기에는 조금 어두운 곡인데? 수란 : ‘많은 경험을 했나 보다’라고 느낄 수 있는 곡이다. 그게 나쁘게 작용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걱정은 안 했다. 나이가 어리지 않으니 이해해주지 않을까.
Q. 흔히 생각하는 희망찬 시작의 느낌은 아니잖아. 당신의 어떤 모습을 알리고 싶었기에 그 노래를 꼽았나? 수란 : 음악을 한다는 게, 내게는 억지로 뭔가를 시작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하던 걸 멈추고 방향을 바꾼 거니까. 물론 지금이야 ‘공대를 다녔다고?’라는 반응이 있지만, 처음 음악을 했을 때에는 묻어있는 분위기라는 게 달랐거든. 여러 경험을 통해 상처도 받고 배우기도 했는데, 그런 사연이 녹아있는 거다. 내가 진지하게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Q. 물론 어느 날 갑자기 ‘내 길은 음악이야!’라고 느끼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공부보다 음악에 뜻을 두게 된 시기가 있었을 텐데. 수란 : 돌아보면 모두 운명 같다고 느껴진다. 왜 나는 오디션을 보지 않고 이렇게 돌아왔을까.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프로듀서와도 왜 그렇게 오래 작업을 했을까. 그런데 그게 다 운명이라고, 내 얘기를 담은 음악을 하려고, 다 배우려고 있었던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베이스에는 긍정적인 성격의 영향이 있었다. 나와 안 맞으니까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 열려 있었거든.
Q. 그런 생각은 앨범이라는 결과물이 나왔기에 도출될 수 있었던 건가? 아니면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건가? 수란 : 내 얘기로 음악을 만들면서 내 성향을 파악했을 때 알게 됐다. 내가 이런 것들을 경험해서 이렇게 담을 수 있게 됐구나, 깨달은 느낌? 아직도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예전 경험들이 도움이 된다는 걸 느낀다.
수란
Q. 과거 SNS에서 자미로콰이의 베이시스트였던 스튜어트 젠더에게 콜라보레이션 제의가 들어왔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수란 : 일단 지금은 서로 바쁘다 보니 그냥 친구처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베이스 세션 필요하면 얘기해’ ‘어? 미안, 나는 베이스 들어가는 트랙이 없어’ 이런 식으로. (Q. 이야~! 재즈 뮤지션들에겐 선망의 대상 아닌가!) 나도 어릴 적에 자미로콰이의 음악을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이젠 정말 뮤지션 대 뮤지션으로 얘길 나누는 거잖아! 신기하기도 하고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 감사했다.
Q. 어떻게 당신의 음악을 알게 된 건가? 수란 : 그 분이 계속 아시아 여자 보컬을 찾았다더라. 그러던 중에 누군가 내 ‘아이 필’ 뮤직비디오 영상을 보여줬고, 수소문해서 연결이 됐다.
Q. 아시아 보컬을 찾았다는 게 좀 신기하다. 사실 알엔비는 아시아에서 출발한 음악이 아닌데다가, 어떻게 보면 아시아인들은 흑인 목소리를 모방하는 것 아닌가. 수란 : 글쎄. 소울풀하다는 건, 흑인 목소리를 얼마나 비슷하게 흉내 내냐의 문제가 아니다. 소울이란 자신의 영혼을 거르지 않고 전부 다 보여주는 음악을 말하는 거다. 살아있는 느낌, 정말 솔직한 느낌, 가공된 음악이 아닌 날 것의 느낌. 테크닉적으로만 접근하는 건 나 역시 반감이 들더라. 진심으로 음악을 대한다면 테크닉이 부족한 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Q. 자신의 영혼을 솔직하게 보여준다는 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할 것 같다. 수란 :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음악이나 사람을 볼 때 긍정적인 부분을 먼저 보려고 한다. 그래서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같아. 하하하. 그덕에 내 영혼을 음악 안에 솔직하게 담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한 번 걸러진 게 아닌,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음악, 감정을 다이렉트로 전달할 수 있는 음악을 앞으로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