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여관.
(part1에서 이어짐) 강준우보다 2세 많은 경남 마산 출신인 드럼 임경섭은 부산예술대 동문이다. “저는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하루에 20시간을 게임하고 4시간 자며 ‘리니지’라는 마의 온라인 게임에 미쳐 사는 쓰레기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게임하며 알게 된 동생이 제 아이템을 다 팔고 날랐는데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당한 사기였죠.” 학교 축제 때 가요제에 나가 3인조 보컬그룹 에이알티(A.R.T)의 ‘슬픈 얼굴’을 불러 3등에 입상한 경력이 있다. 가요제 입상 이후 유명해진 그는 학교에 가기 싫어 교수들에게 “서울의 기획사에 가수 준비하러 간다”고 ‘뻥’을 쳐 수업을 빼 먹었다. 대신 축제 때 노래해줄 것을 요청한 교수들의 제안을 받았을 때 서울에서 내려온 것처럼 속였고 요약본을 받아 시험을 치러 거의 모든 과목에서 D 학점을 받았다. 이후 부산 팝스 오케스트라 멤버로 6개월 동안 활동을 하다 부산 경남 권에서 피아노 학원에 드럼을 보급하는 강사 일을 시작했다. 임경섭은 지인의 소개로 상경해 남성듀오 캔이 소속된 기획사에 들어가 y2k를 모델로 삼아 일본 비주얼 콘셉트로 밴드결성을 꿈꿨지만 ‘실력이 없다’는 이유로 붕 떴다. 생활이 난감했던 그는 40대 형님들로 구성된 5인조 직장인 밴드 비스므리에 들어갔다. 베이스 멤버였던 디자인회사 사장 형의 회사를 다니며 다자인을 배워 2년 정도 생활을 했다. 모아 둔 500만원을 투자해 연습실을 마련했던 그는 회사 사정이 나빠져 또 돈을 날렸고 여자 친구와도 헤어져 결국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우울증에 걸려 한 달 동안 벽만 보고 지냈던 그에게 충격을 받은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이러지 말라”고 애원을 했다. 정신을 차린 그는 드럼 세미나 강사 일과 7080나이트클럽에서 드럼 세션을 하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와이프가 서울로 간다고 해 따라나선 그는 강준우와 육중완을 만나 함께 밴드를 하고 싶어 음악 내용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합류했다.장미여관 공연 현장.
“당시 퍼커션 특히 잼배가 유행했던지라 서울에 올라온 경섭이 형에게 같이 하자고 했어요. 사실 중완 형(부산에선 나이가 같아도 생일이 빠르면 형이라 부른다고 한다.”과 싱글 음반 녹음이 다 끝난 상태라 경섭 형은 녹음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재킷 사진만 함께 찍었습니다. 당시 음반 제작경비가 300만원 정도였는데 앨범 비용 1/3을 n분의 일로 받았죠. 뭐 정확하게는 일하면서 번 돈에서 까는 식이었습니다.”(강준우) “밴드 결성 한 달 전에 경섭이 형을 처음 만났는데 말할 때 항상 제 눈을 피하는지라 멘탈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육중완). 2011년 꽃으로 치장한 수염을 착용한 세 명의 파격적인 반 누드 사진을 찍어 데뷔 EP를 발표했다. 이들은 밴드 와이낫 키보디스트 유지훈와 홍대 족발 집 ‘핫 족’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며 음악을 함께 했었다. 유지훈은 ‘장미여관’이 아닌 ‘와이낫’ 멤버로 톱 밴드2 출전을 선택해 임경섭의 고교 후배 배상재가 영업되었다.ADVERTISEMENT
2000년 친구 3명과 함께 상경한 그는 서울재즈아카데미 고급과정을 수료하고 군 복무를 마쳤다. 제대 후 백제예술대 실용음악과에 다시 입학한 그는 5년 동안 정식으로 음악을 공부한 후 가수들의 라이브와 녹음 세션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남의 음악만 연주하다보니 자신의 음악을 하고 싶은 갈증을 느껴졌다. 4인조 혼성밴드 T-Ok!(티오케이)를 결성해 2009년 싱글에 이어 2010년 정규앨범까지 발표했지만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2011년 4인조 모던 록 밴드 스타라이트에 들어가 음반을 또 냈다. 당시 프로듀서 활동을 병행했던 그는 고등학생 트로트 가수 음반도 제작했다. 그는 고등학교 스쿨밴드 선배 임경섭의 전화를 받고 장미여관에 합류를 했다.
장미여관.
개그맨을 꿈꿨던 전남 해남 출신 윤장현은 같은 동네에 살던 강준우와 친하게 지내다 가장 늦게 밴드에 합류했다. 그는 취미로 기타를 쳤던 형의 영향으로 중학교 때부터 기타를 독학으로 배웠다. 목포과학대 들어가 5인조 스쿨밴드 서브웨이 4기로 음악을 시작했다. 광주 31사단 문선대에서 활동한 그는 목포 KBS 백밴드 펑키의 멤버로 공개방송에서 연주활동을 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상경했다. 서울재즈아카데미 2기로 들어간 그는 1997년 트로트 작곡가 전홍민을 만나 같이 살며 음반기획사 일에 관여했다. 1998년 부도가 난 동대문 녹음실을 정리하고 4인조 펑키 록 밴드 애플잼을 거쳐 2001년 3인조 갱스터 록 밴드 후퍼를 결성해 2년 정도 활동하며 300개 밴드가 연합한 친목회 홍합회를 만들었다. 이후 5인조 밴드 라일락을 결성한 그는 2006년 4인조 혼성 라일밴드로 음반을 발표했다. 당시 후배들이랑 홍대 쪽에 녹음실을 운영했던 그는 아마추어 밴드 데모녹음과 베이스 레슨을 하다 벌이가 시원치 않아 룸싸롱에서 반주 일을 4년 정도 했다. 라일밴드와 더불어 4인조 재즈연주밴드 노트메이커 활동을 병행하다 가장 늦게 장미여관에 합류했다.ADVERTISEMENT
2013년 4월 밴드음악을 통해 다양한 장르의 12곡을 담아 첫 정규 앨범 <산전수전 공중전>을 발표했다. 어쿠스틱 복고풍 사운드가 근사한 ‘오빠들은 못 생겨서 싫어요’는 서울 홍대 인근 놀이터에서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가 상처받은 내용을 스케치한 노래다. 캠퍼스밴드의 추억을 되살리는 경쾌한 리듬의 ‘오래된 연인’, 블루스 질감의 ‘서울살이’, ‘좋아요’는 포크, 웃음이 절로 나오는 ‘하도 오래되면’은 그런지 록 스타일이다. 이처럼 장미여관은 장르에 매몰되기보단 해학적이고 솔직한 가사로 대중과 소통하는 음악을 지향한다. 유쾌한 이들의 음악은 이미 존재가치가 증명되었다. 문제는 밴드를 통해 구현한 장르의 다양성은 1집의 장점이면서 음악적 정체성과 앨범의 통일성을 산만하게 만드는 단점이기도 하다. 또한 튀는 외모와 유머러스한 가사, 퍼포먼스에만 집중되는 대중적 관심은 인지도와 재미를 획득시킨 보약임에 분명하지만 음악적 진지함과 감동을 상실시키는 독이 될지도 모른다.
데뷔 싱글(2011), 디지털 싱글 부비부비(2012), 1집 산전수전공중전(2013) (왼쪽부터)
사실 이들의 음악은 슬픈 마이너 정서가 짙게 깔려있다. 코믹하고 튀는 퍼포먼스나 아이디어가 중심인 음악은 대중의 즉각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달콤함이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음악적 정체성과 발전에 저해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음악적 잠재력이 풍부한 밴드 장미여관이 지향해야 될 롱런의 미덕은 대중과의 적극적 소통과 더불어 ‘봉숙이’에서 보여준 해학과 감동이 공존하는 자신들만의 색채가 분명한 독창적인 창작음악일 것이다.ADVERTISEMENT
장미여관 프로필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강준우 보컬/기타 1980년 8월 15일 부산 출생 부산예술대 실용음악과 중퇴
육중완 보컬/기타 1980년 1월 4일 부산 출생 부산 동의공전 전기과 졸업
임경섭 드럼 1978년 12월 31일 경남 마산 출생 부산예술대 실용음악과 중퇴
배상재 기타 1979년 12월 14일 경남 진해 출생 백제예술대 실용음악과 졸업
윤장현 베이스 1974년 2월 20일 전남 목포 출생 목포과학대 중퇴, 서울재즈아카데미 2기
2001년 3인조 갱스터 록 밴드 <후퍼> 결성, 밴드연합 친목회 <홍합회> 창립 윤장현
2006년 4인조 혼성 라일밴드 결성 윤장현
2008년 남성듀오 고구마 결성 육중완
2009년 어쿠스틱 듀오 프린지 결성 강준우
2009년 4인조 혼성밴드 T-Ok!(티오케이) 결성 배상재
2011년 4인조 모던 록 밴드 스타라이트 멤버 배상재
2011년 3인조 밴드 장미여관 결성
2012년 5인조 밴드 장미여관 결성 KBS 2TV <톱밴드2> 8강
2013년 케이블 방송 엠넷 <밴드의 시대> 장르파괴 미션 우승
편집. 홍지유 jiyou@tenasia.co.kr
사진제공. 록스타뮤직앤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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