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민 / 사진제공=CJ ENM
이성민 / 사진제공=CJ ENM
"사고를 당하거나 다쳐서 어느날 일을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상상을 해봤어요. 아직 살날이 창창하고, 가족 부양을 위해서도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영화 '어쩔수가없다'에서 구직자 구범모를 연기한 배우 이성민 얘기다. '어쩔수가없다'는 25년간 제지회사에 근무한 만수(이병헌 분)가 갑작스레 해고당한 후 재취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얘기. 이성민은 제지업계로의 재취업이 절실한 업계 베테랑 구범모 역을 맡았다.

이성민은 "캐릭터와의 닮은 구석을 찾아내려고 하는 편인데, 범모의 성격이나 취향은 나와 닮진 않았더라. 내가 그동안 연기해온 캐릭터들은 그렇게 평범하진 않았다. 형사라든가 범인이라든가 특수한 직업이나 상황이 있는 인물이면 오히려 캐릭터 잡기가 수월한데, 평범한 직장인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됐다. 그래서 평범한 캐릭터들이 연기하기 더 부대끼거나 부담되는 편"이라고 털어놨다.

이성민은 "범모를 이해하기 수월했던 건 자기 직업에 대한 자존감이 있다는 것"이라며 "범모 등 영화 속 캐릭터들은 단순히 직장을 잃어버려서 방황하고 있는 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아라(범모의 아내)는 '실업해도 카페 등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는데 왜 그런 대책을 취하지 않느냐'고 한다. 범모가 그러지 못하는 건 평생 한 가지 일밖에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며 "범모에게 종이 만드는 일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실존에 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배우 이성민'과 범모가 닮았다. 나 역시 범모와 같은 입장이 된다면 뭘 해야 할지 모를 것"이라고 했다.
사진제공=CJ ENM, 모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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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민이 이 영화에 출연한 건 '거장'으로 꼽히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참석했던 이성민은 기억나는 외신 질문이 있냐는 물음에 "작품 선택 이유를 묻더라. 마침 직전에 감독님이 제작비에 관한 얘기를 하셔서, 저는 '돈 때문에 이걸 하진 않았다. 박찬욱 감독님 때문에 했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에서 사람들이 다들 감독님을 '감독님'이 아니라 정말 '마에스트로'라고 부른다"며 박 감독을 향한 존경심을 표했다.

"박 감독님은 다른 상상력, 다른 시선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내가 이 대본을 이해하고 그의 상상력에 부합할 수 있을지 고민이 있었죠. 시나리오는 워낙 촘촘하게 잘 쓰여 있어서 이 시나리오의 지시를 잘 수행하는 게 목표였어요. 그 강도나 크기는 제가 결정해야 하는데, 첫 테이크 때 많이 긴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만수가 면접 보고 내려올 때 제가 옆에 있는 신이었는데, 별거 없는 장면인데도 '첫 만남'이기에 많이 떨리고 긴장됐던 기억이 납니다."
사진제공=CJ ENM, 모호필름
사진제공=CJ ENM, 모호필름
극 중 범모의 아내 아라(염혜란 분)는 젊은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 캐릭터에 숨겨둔 디테일이 있냐는 질문에 이성민은 "아라와 피크닉을 가다가 아라가 공기를 마셔보라고 할 때 아라를 뚱하게 바라보는 표정이 있잖나. 내면에는 그녀가 바람피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나온 표정이다. 관객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를 바라봤다"고 답했다. 영화에서는 범모와 아라의 과거 러브스토리를 짧게 보여주기도 하는데, 현재와 달리 사랑에 순수했던 두 인물의 모습이 현재와 대비돼 더욱 씁쓸함을 안긴다.

"이 영화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잃어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가족을 잃어가고 도덕성,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죠. 그렇게 잃는 것 중 하나가 순수함인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신을 넣은 게 아닐까 싶어요. 범모는 아라를 그렇게 사랑했고 일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껴왔는데, 이젠 직업도 잃고 순수한 사랑도 잃고 술에 취해 찌들어 있는 상태인 거죠. 둘은 유치할 순 있지만 옛날에 그렇게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사랑을 했던 것 같아요."

이성민은 전작인 코미디 영화 '핸섬가이즈'에서 '하얀 뱃살' 노출신을 선보인 바 있다. 이번 영화에서는 과감한 뒤태 노출신을 선보인다.

"큰 부담은 없었어요. 범모가 늪에 빠져있다가 새롭게 태어나는, 새로운 다짐을 하는 신이죠. 중간에 브릿지 같은 컷이에요. 작품에 필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했어요. 원래 콘티 상으로는 일어나서 벗고 옆모습으로 목욕탕으로 가는 거였는데, 감독님이 현장에서는 옆모습까진 안 하고 일어나는 걸로 끝냈어요. 아주 어렵진 않았어요. 범모가 근육질이나 슬림한 뒷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서 보는 분들이 흉하게 볼 수도 있겠네요. 하하하."
사진=텐아시아DB
사진=텐아시아DB
이성민은 배우의 꿈을 꿨던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로 연극배우 시절, 그리고 오랜 무명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배우 생활의 고비가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연기를 향한 열정을 이어왔다. 그는 "사실 10년 하고 힘들어서 포기하려고 했는데, 할 줄 아는 게 없더라. 20대 중간에 연극을 그만둔 적 있다. 막노동했는데 너무 힘들더라. 차라리 연극을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며 미소 머금었다.

"10년 이상 이 일을 했더니 포기 못 하겠더라고요. 갈 곳도 없었고요. 저한테 연기는 실존에 관한 얘기예요. 어느 날 그만둔다면 전 아무것도 못 해요. 범모를 이해하는 이유죠. 우리 딸한테도 그런 얘길 했어요. '아빠는 이거밖에 할 줄 모른다'고. 난 이게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심지어 취미도 없고 여행도 갈 줄 몰라요. '너는 안 그랬으면 좋겠다. 네가 하고 싶은 거 했으면 좋겠다'고 했죠. 일을 계속하게 된 건 딴 걸 할 줄 몰라서예요. 건강하고 지키면서 해야겠죠. 하하."

김지원 텐아시아 기자 bella@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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