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전히 로 진가신 감독을 기억하는 관객들이라면 최근 개봉한 은 의외의 귀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쉬운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선언 적인 제목과 달리 의 속살에는 진가신의 낙인이 선명히 찍혀있다. 홍콩 무협 영화의 틀 위에 ‘CSI’ 같은 현대 수사물의 표현 기법이 뒤섞은 은 견자단과 왕우 같은 클래식한 영웅들 사이에 자아 분열적인 동시에 호기심과 의협심이 강한 수사관(금성무)을 배치함으로서 기묘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대결의 승자나 싸움의 기술보다는 각각 캐릭터의 사연에 집중하게 되는 이상한 무협 영화. 그러고 보면 주먹도 칼도 창도 뚫을 수 없는 복잡하고 예민한 감정의 대결에 있어서 그는 언제나 따라올 수 없는 내공을 자랑하는 ‘고수’였다. 멜로의 고수가 인정한 멜로 영화들이 여기 있다. 그야말로 닥치고 관람, 인 것이다.

2004년 | 미셸 공드리
“최근 몇 년 간 본 영화 중 최고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사랑과 상실,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 같지만 동시에 매우 낙관적인 시선을 보여주거든요. 그것이 언제나 내가 믿어왔고, 지금도 믿는 바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세계죠.”
한 때 사랑을 했고, 대부분의 연애의 끝이 그렇듯 지리멸렬하게 헤어진 남녀, 이제 두 사람은 그 고통스러운 실연의 기억을 지우려 한다. 뷔욕이나 벡 등의 뮤직비디오에서 엉뚱하고 허를 찌르는 상상력을 보여주었던 감독 미쉘 공드리와 , 을 통해 일찌감치 인간의 뇌 탐험에 일가를 이루었던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만이 손을 잡은 ‘뇌로 보는 멜로 영화’.

2001년 | 허진호
“물론 아름다운 사랑 영화이지만 동시에 이별의 과정이 너무나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요. 진짜 감정 말이죠. 이별은 사랑만큼이나 제가 늘 관심을 두고 있는 이야기인데 허진호 감독은 그 이별의 고통을 정말 실감나게 표현했더군요.”
사랑을 시작할 때 그들에게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대나무 밭에서, 새벽의 산사에서 그저 조용히 바람 소리를 듣고, 내리는 눈을 맞는 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시작된 사랑의 균열은 자꾸 소리를 낸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남자의 말은 그렇게 대답 불가의 질문이 되어 봄날의 어느 골목을 돌아간다.

2009년 | 롭 마샬
“은 상업적 실패와 함께 너무나 저평가되어서 안타까운 작품이죠. 하지만 놀라운 영화임에 분명하고 개인적으로는 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대부분의 감독이라면 극 중 귀도(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겪게 되는 고민과 딜레마에 동감하지 않을까요.”
페데리코 펠리니의 에 의 롭 마샬 감독이 뮤지컬적 기운을 ‘1/2’ 더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 니콜 키드먼, 페넬로페 크루즈, 마리옹 꼬띠아르, 소피아 로렌, 주디 덴치, 케이트 허드슨 등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숨 가쁜 배우들이 등장하는 거대한 쇼 위로 창작의 강박에 시달리는 한 예술가의 절규가 흐른다.

1995년 | 이와이 ?지
“나의 관점이나 시선을 완전히 뒤엎어버린 영화였죠. 결국 ‘사랑’에 대한 영화이지만 단순히 ‘연애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물론 영화 전체를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보이게 했죠. 하지만 저는 이 영화가 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사랑의 낙관론자가 연출한 가장 비관적인 러브 스토리죠.”
하얀 커튼이 나부끼는 교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 소년, 설원 위에 울려 퍼지던 애절한 인사말 “오겡끼데스까”. 하지만 를 교복 입은 소년 소녀를 내세운 팬시 용품,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멜로 영화의 범주에 묶는 것은 합당한 대우는 아니다. 죽음과 기억을 잇는 정밀한 회로 위에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정서로 배열해내는 이와이 ?지의 치밀한 설계도는, 그저 본 적 없이 부드러운 외피를 두르고 있었을 뿐이다.

1942년 | 마이클 커티즈
“80년대, 20대 초반에 레이저 디스크로 처음 봤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언제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내 인생 최고의 영화이고요. 나이든 남편이나 애인이 있던 여자가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클래식한 삼각관계(물론 캐스팅에서 나이가 좀 뒤바뀌긴 했지만)에 언제나 매혹되는데, 사실 에서 장만옥과 증지위 그리고 여명의 관계나 도 그 원형은 라고 할 수 있어요.”
“Play It Again, Sam.” 한 여자의 요청에 연주 금지곡이었던 ‘As time gose by’가 울려 퍼지던 날. 일시적인 평화가 유지되던 카사블랑카도, 한 남자의 심장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잉그리드 버그만과 험프리 보가트, 폴 헌레이드의 ‘러브 트라이앵글’은 마지막 순간 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하기까지 팽팽하게 영화의 긴장을 지탱하는 아름다운 꼭지점이다.

글. 백은하 기자 one@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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