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장르음악이 공존했던 1980년대에는 민중가요도 인기가요 차트에 진입했던 시절이 있었다. 변혁의 시대였기에 민주화를 갈망하는 대중에게 서사적인 메시지를 담은 민중가요는 큰 울림을 구현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중가요의 현주소는? 민중가요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대중의 관심사가 급격하게 이동한 디지털시대에 접어들면서 현저하게 힘이 빠져있다. 독특한 개성과 황금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지금, 과연 민중가요는 80년대의 영광수준은 아닐지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여지는 있는 것일까?민중가요 보컬그룹 ‘우리나라’의 멤버 백자가 솔로 활동을 통해 어둠을 헤치며 해답을 찾아 가는 음악여정을 걷고 있다. 그는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혹은 걸었던) 선배가수들인 정태춘, 고 김광석, 안치환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백자가 풀어야할 음악적 숙제는 정태춘이 ‘92 장마 종로에서’로 민중요가요의 새 지평을 제시했던 것처럼 민중가요 같지 않은 새로운 민중가요를 제시하는 음악작업일 것이다. 조하문과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CCM 같지 않은 CCM으로 엄청난 대중적 파급력을 획득했던 것처럼 말이다.
백자에 대한 기대감은 자신만의 음악스타일을 추구하는 창작활동에 있다. 백자의 음악을 주도하는 감성은 포크지만 장르 특유의 저항적이거나 담백한 원형질에 매몰되기보단 기타 사운드를 기반으로 포크 록, 블루스 포크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음악 스펙트럼을 펼쳐낸다. 호소력 짙은 멜로디에 삶의 향기가 배어나는 인간적인 가사 그리고 진성과 가성을 넘나드는 드라마틱한 가창력은 매력적이다. 때론 삶의 진솔함이 담긴 느린 질감을 때론 경쾌하고 변화무쌍한 멜로디에 담긴 그의 내밀한 감성은 위로의 기능이 탁월하다. 만약 무더위와 장마에다 사회적 부조리에 짜증이 제대로 나 있어 위로와 가슴을 데워줄 노래에 타는 목마름을 느낀다면 백자의 노래들은 시원한 생수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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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새마을노래를 듣고 일어나 교가와 사가를 함께 불렀던 집단문화가 대세였다면 디지털 세상을 살아가는 지금의 대중은 내가 중심인 세상이 더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대중과 소통을 시도하는 백자의 노래는 현재적 어법이지만 과거의 아날로그 정서가 녹아 있다. 삶의 고단함을 담은 느리고 끈적끈적한 질감과 격정과 평온을 넘나드는 그의 감성은 실로 변화무쌍하다. 그는 ‘열 받았을 때는 격하게 분노하다가도 혼자 있으면 고독해지는 극단적인 성격’이라 한다. 그의 노래들은 그런 그의 성격과 판박이다.
하나의 주제나 추구하고 싶은 사운드에 집중하는 콘셉트 음반 발표는 그의 음악적 숙제다. 이는 백자의 음악내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뮤지션들이 안고 있는 공통의 문제다. 그런 점에서 백자의 ‘2집 제작을 위한 십시일반 프로젝트’는 이 땅의 모든 가난한 뮤지션들에게 하나의 롤 모델을 제시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1집을 제작했던 그는 사실 2집을 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크고 작은 무대를 발로 뛰면서 자신의 노래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열혈 팬들을 보며 희망을 품었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SNS를 통해 자신의 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을 대상으로 소셜펀딩을 해 제작비를 성공적으로 충당했다. “1집 제작비를 후원한 지인들은 내 음악에 대한 신뢰감보다는 불우이웃돕기 개념이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또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는 것이 민망해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포털 다음 팬 카페 같은 SNS를 통해서만 진행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성과에 제 스스로 놀랬습니다. 1집은 사람을 보고 이번에는 음악을 보고 도와준 것 같아 제 음악들에게 고마운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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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수가 없고 운동을 못했던 어린 시절의 그는 동네 친구들이 논바닥 축구놀이에 끼어 주지 않아 혼자서 풀을 뜯고 꽃을 보면서 놀며 그만의 감성을 배양했다. 6학년 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혹여 막내가 아버지 없는 호로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을까봐 늘 “조신하게 살아야한다”고 당부해 감정을 분출할 사춘기까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살았다. 그래서 억눌린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일기나 시 같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출했다. 일기장에 그림을 그려 넣었던 그는 500원 내고 하루 종일 만화를 볼 수 있는 만화방에서 살았던 만화 광이었다. SF, 영웅문 같은 무협 만화를 좋아했던 그에게 허영만의 ‘고독한 기타맨’과 ‘카멜레온의 시’는 지대한 영향력을 안겨주었다. 고등학생 때는 ‘카멜레온의 시’에 인용된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로트레아몽의 시나 이상의 시를 탐독했고 글자를 파괴하고 뛰어 쓰기가 없는 형식파괴적인 시에 특히 열광했다.
중2 때 서울로 올라왔다.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아 시와 그림일기를 일 년에 서너 권씩 섰던 그는 자양고 2학년 때 이문세, 유재하, 한영애의 노래에 푹 빠졌다. 가장 좋아했던 노래는 록밴드 들국화의 ‘제발’. “특히 이문세의 명곡들을 작곡한 이영훈님을 너무 좋아했어요. 그 분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마음이 아파 제 블로그에 추모 글을 포스팅 했습니다. 당시는 노래에 대한 저작권이 강화되어 그 글에 붙인 노래들이 적발이 되었죠. 부끄럽게도 저작권 강의까지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고3때 중간고사를 마치고 놀러간 북한산에서 기타를 가져온 한 친구가 ‘로망스’를 연주하는 모습에 반했다. 기타를 배우고 싶었지만 형편이 되지 않아 골판지에 오선지 그려가며 로망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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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한국외국어대 1학년 2학기 때 선배의 도움 받아 친구들과 상경대학 노래패 ‘맥박’을 창설했다. 1993년 한국외대 총학생회 문화국장 백자는 학내 재단비리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학교 측의 미움을 샀다. 추석 때, 한총련 출범식 시위를 주도했다는 엉뚱한 이유로 경찰 수배가 떨어져 강원도 강릉 경포대에서 몇 일간 도피 생활을 했다. 당시 운동권 활동에 전념했던 백자는 수업을 제대로 받지 않아 결국 학사제적을 당한 상태였다. 1994년 유화국면이 조성되면서 수배 학생들이 대거 경찰조사를 받았다.(part2로 계속)
백자 프로필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1972년 4월 9일(음력) 전남 장흥 출생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 졸업
1997년 광운대 월계가요제 대상, 노래모임 ‘혜화동 푸른섬’ 멤버
1999년 민중가요 보컬그룹 ‘우리나라’ 결성
2007년 포항 MBC 주최 제2회 대한민국 창작포크가요제 2등
2009년 산악다큐멘터리영화 ‘벽’ 음악감독
2011년 다큐영화 ‘걸음의 이유’ 음악감독 부산국제영화제 출품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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