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은 지난 8월 26일 개봉한 영화 '경주기행'(감독 김미조)에서 딸을 잃고 복수에 나선 엄마로 관객을 만났다. 딸을 잃은 상실감과 공허함을 품고 그냥 살아가기보다 슬픔을 복수심으로 치환하고 결국 살인범과 마주하는, 평범한 엄마와는 다른 결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정은은 과거 작품에서도 서늘함과 친근함을 오가며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이정은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2019년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에서는 박 사장 가족의 전 가사도우미 문광 역으로 분했다. 그는 친근한 인물로 등장했다가 지하실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극의 분위기를 단숨에 뒤집는 역할로 활약했다.
같은 해 OCN '타인은 지옥이다'에서는 고시원 주인 엄복순 역을 맡았다. 겉으로는 푸근한 주인처럼 보이지만 고시원의 끔찍한 비밀과 연결된 섬뜩한 인물이었다. 친숙한 얼굴과 말투 속에 숨겨진 반전이 공포를 극대화하며 몰입도를 높였다.
이후에도 변화는 계속됐다. tvN '우리들의 블루스'에서는 제주에서 생선가게를 운영하는 정은희 역을 맡아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중년 여성의 모습을 표현했다. 넷플릭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는 정신건강의학과 수간호사 송효신으로 분해 현실적이고 단단한 직장 선배를 연기했다.
영화 '좀비딸'(감독 필감성)에서는 정환(조정석 분)의 엄마이자 좀비가 된 손녀 수아(최유리 분)를 지키는 할머니 밤순 역을 맡았다. 거침없는 말투와 행동으로 웃음을 담당하는 동시에 손녀를 끝까지 품는 가족애를 표현했다. 짧은 기간 다양한 작품에 등장한 이정은은 생활극부터 휴먼드라마, 코미디와 스릴러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입증했다
이정은의 강점은 친숙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작품마다 제각각 다른 캐릭터처럼 느껴지게 한다는 점이다. 연극 배우로 시작해 오랜 기간 쌓아온 내공이 스크린과 안방극장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발현되고 있다.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쳐 조연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남기던 이정은은 이제 작품을 직접 이끄는 주인공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50대 중반에도 익숙한 이미지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장르와 캐릭터에 도전하고 있는 이정은이 오는 9일 개봉되는 '아버지의 집밥'을 비롯한 차기작들에서 어떤 새로운 얼굴을 꺼내놓을지 기대를 모은다.
박의진 텐아시아 기자 ejin@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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