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의 박찬욱 / 사진제공=CJ ENM
'어쩔수가없다'의 박찬욱 / 사진제공=CJ ENM
박찬욱 감독이 '공동경비구역'(2000) 이후 25년 만에 배우 이병헌과 다시 만났다. 실직자의 이야기를 블랙 코미디로 풀어낸 '어쩔수가없다'를 통해서다. 오랜 시간 영화계에 몸담았던 그가 내놓은 이 영화는 최근의 영화 산업 불황도 연상시킨다. '거장'으로 꼽히는 박 감독이지만, 그도 업계에서의 '해고'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박 감독을 만났다. '어쩔수가없다'는 25년간 제지회사에 근무한 만수(이병헌 분)가 갑작스레 해고당한 후 재취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얘기. 이 영화는 유머와 풍자를 가득 담고 있다. 원작은 미국 소설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액스(The Ax, 도끼)'이다.

영화 속 재취업이 절실했던 만수는 도덕성을 잃고 '경쟁자 제거'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박 감독은 "처음 원작을 읽었을 때 거기서 은근히 풍겨 나오는 유머가 좋았다. 그게 자극이 된 것 같다. 이것을 코믹한 영화로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또한 "아무래도 시스템 속 노동자의 얘기다 보니,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 생각이 안 날 순 없었다. 그렇다고 '모던타임즈'를 다시 보진 않았다. 그래도 한 번 그 생각이 드니 코믹한 쪽으로 가게 됐다"고 얘기했다. 콧수염을 기른 극 중 이병헌의 외형도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킨다.
사진제공=CJ ENM, 모호필름
사진제공=CJ ENM, 모호필름
영화는 우스꽝스러운 상황과 어리석은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만연한 기술주의와 인간성 상실을 비판한다. 박 감독은 "슬픈 얘기를 계속 우울한 기조로 묘사한다고 이 비극이 더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웃길수록 반대로 인물에 대한 연민은 더 커지고, 비극성이 더 강해진다"고 설명했다. 또한 "여기 나오는 코미디의 많은 부분이 만수의 어리석음에서 나온다. 미숙하고 우왕좌왕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의 모습 말이다. 자신의 직업 세계에선 노련한 전문가인데, 새로운 '임무'를 하는 데는 완전 초보로 허둥지둥한다. 그럼으로써 생기는 코미디라는 것은 보기에 슬픈 것"이라고 전했다.

원작은 평범한 가장이 살인을 통해 괴물이 돼가는 과정에 초점을 둔 범죄 스릴러에 가깝다. 반면 영화는 이러한 과정을 비극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럽게 그려낸 블랙 코미디다. 원작과 다소 다른 분위기로 전개된 이유에 대해 박 감독은 "전작 '헤어질 결심'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헤어질 결심'은 느리고 여백이 많은 영화다. 그래서 다음 작품은 나도 모르게 달리 한 것 같다. 영화를 만들 때 직전 작품과 다르게 하고 싶은 마음이 늘 있다. 반복되면 나 스스로 지루하게 느끼니까 일하는 재미가 없다. '올드보이' 때나 '친절한 금자씨' 때처럼 절제 없는 장면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한정하지 않고 다 표현하겠다는 마음으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올드보이', '박쥐', '아가씨', '동조자' 등 원작 있는 작품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 박 감독.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다. 오리지널리티 욕심은 없냐는 물음에 박 감독은 "욕심 없다. 나는 원작이 있으면 좋겠다. 각본도 누가 써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영화를 더 자주 만들 수 있다"고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좋은 소재 만드느라고, 각본 쓰느라고 1~2년 보내는데 누가 주면 맨날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사진=이병헌 SNS
사진=이병헌 SNS
영화의 주인공 이병헌은 최근 자신의 SNS에 "시간이 흐르는 건 어쩔 수가 없다"라는 글과 함께 시사회 뒤풀이에서 만난 송강호, 신하균과 찍은 사진을 공개해 추억을 소환했다. 세 사람과 박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를 함께했다. 박 감독은 "시사 끝나고 뒤풀이에서 강호 씨와 하균이, 셋이서 내 맞은편에 앉아있었다"고 그날을 회상했다. 이어 "웃기기도 하고, 이 친구들이 언제 이렇게 늙었나 싶어서 서글프기도 하더라. 나이 생각하면 잘 관리하고 잘 버티고 있는 얼굴 같기도 하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나를 포함해서 잘 버티고 살아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미소 지었다.

영화의 결말에 대해서는 "관객이 자기 인생관에 맞춰 해석할 것이다. 현재 자기 가정이 어떤지, 자기 부모는 어땠는지 등 인간은 자기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각자 (결말의 의미를) 선택하리라 생각한다. 어떤 분은 (결말을 확실히) 묘사해주길 바라지만, 또 어떤 분은 아니길 바라기도 한다"며 여지를 남겼다.

영화에서는 AI나 자동화 등 첨단 기술로 인해 인간의 일자리가 기계로 대체되는 상황을 제지업을 통해 얘기한다. 이는 몇 년 새 급격히 어려워진 영화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오랜 시간 영화 일을 하며 영화 산업의 흥망을 모두 경험한 박 감독. 그는 "'JSA' 전 어려운 시절을 겪었다. 영화를 어떻게든 연출해보려 영화사들, 프로듀서들을 찾아다녔다. 시나리오도 보여줬다. 그런 세월이 길었다. 잘 되는 듯해서 계약서를 썼다가 여러 번 무산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또한 "그 공포는 크게 자리하고 있다. 내가 만든 영화가 수익을 내지 못한다면 당장 한두 편은 버틸지 몰라도 서너 편이 되면 투자가 들어오지 않을 거다. 그런 날이 오리라 생각한다. 원작을 읽을 때 반했던 건 그런 이유도 있다"고 털어놨다.
'어쩔수가없다'의 박찬욱 / 사진제공=CJ ENM
'어쩔수가없다'의 박찬욱 / 사진제공=CJ ENM
이번 작품의 흥행 목표를 묻자 박 감독은 "언론에서 '이 정도면 한국 영화 산업에 기운을 좀 되살렸다' 정도의 기사를 쓸 만한 정도면 좋겠다. 수출이 좀 됐기에 수익을 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 상황이지만, 그것보다는 좀 더 잘 되길 바란다"고 답했다.

'어쩔수가없다'는 이미 개봉했지만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년 3월 열리는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의 국제장편영화 부문에 출품됐다. 박 감독은 "오스카는 양면성을 가진다. 후보가 되지 않으면 영화 홍보에서 일찍 '은퇴'할 수 있기 때문에 휴식도 취할 수 있고 다음 작품도 물색할 수 있다는 좋은 점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후보가 되면 몇 달 동안 한참 바빠야 하고 '죽음의 레이스'가 시작된다"고 전했다. 올해 62살인 박 감독은 "'이 나이에' 싶기도 하지만 '되면 좋겠다'는 양면적 감정이 든다"며 미소 지었다.

김지원 텐아시아 기자 bella@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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