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파 감독' 정지영의 날카로운 시선
삼례 나라슈퍼사건의 '그날' 이야기
'소년들'이 의미있는 이유는?
삼례 나라슈퍼사건의 '그날' 이야기
'소년들'이 의미있는 이유는?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시작을 알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뼈아픈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 '1987'(감독 장준환), 2000년 8월 10일 발생한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으로 억울한 누명을 쓴 최 군의 이야기를 담은 '재심'(감독 김태윤), 7세부터 22세까지 남녀 장애학생들을 대상으로 비인간적 아동 학대와 집단 성폭행의 경악을 금치 못하는 광주인화학교 사건을 다룬 '도가니'(감독 황동혁)까지.
세 영화가 가진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뭘까.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얼룩지고, 서글픈 우리의 역사이자 다시 써내려 가야 할 사건의 기록이다. 언뜻 들어봤고 언론을 통해서 접하는 사건들은 스크린 위에 새로이 재현되어 관객들을 만나곤 한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을 감독들은 왜 영화로 제작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모티브로 한 정지영 감독의 영화 '소년들'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는 그 시간에 멈춰있던 '소년들'의 녹슨 시계태엽을 움직이도록 한다.

영화 '소년들'은 사건이 일어난 경위를, 선형적 구조가 아닌 비선형적 구조로 풀어낸다. 1999년, 2000년, 2016년의 시간대를 교차로 배치하며, 새끼줄을 꼬듯 감정을 엮어내는 것이다. 정지영 감독은 그 당시 담당 형사와 검사가 후다닥 사건을 해치웠던 것처럼,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밤의 슈퍼 안의 우는 아이와 들이닥친 강도의 이미지가 나열된 오프닝부터 강도 살인사건 혐의가 기소되는 과정을 빠르게 압축한다. 대신 그 자리에 형사 황준철(설경구)를 배치한다. 이미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있는, 황준철의 희끗희끗한 머리와 얼굴은 세월의 시련을 정통으로 맞아 지친 내색이다. 함께 일하던 옛 동료이자 후배 형사 박정규(허성태)는 "16년 전, 살벌했던 눈빛이 아냐"라고 달라진 모습의 황준철을 언급한다.

집단 안에서 단독 행동하면, 반드시 눈엣가시가 될 터. 무엇보다 이미 종결되어 가해자 3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은 마당에 경찰 내부에서 황준철의 독단적인 행동은 거슬릴 수밖에 없다. 당시 사건의 책임 형사였던 최우성(유준상)은 들쑤시고 다니는 황준철의 수사를 제지하며 압력을 가한다. 소년들이 수감되어 있는 감옥을 찾아가 의문점을 해결하고, 진범 이재석(서인국) 외 2인을 데리고 온 황준철은 국가 기관의 강력한 은폐 앞에서 무력하게 물러나야만 했다. 폭력 수사 탓에 소년들은 보복이 두려워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끝내 그날의 기록을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됐다. 영화 내내 비치는 황준철의 뒷모습은 완주서를 떠나야 했던 후회와 통한이 가득 담겨있다.

정지영은 잊지 말아야 할 사건들의 낡은 시계태엽을 다시 수리해 재가동시키는 일명 '사회파 감독'이다. 2003년 미국계 사모펀드 중 헤지펀드인 론스트가 외환은행의 지분 51%와 경영권 인수 및 매각 과정을 다루는 '블랙머니'(2019), 1985년 9월 민청련 사건으로 구속된 후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했던 실화를 다룬 '남영동 1985'(2012), 2007년 대학 입시시험에 출제된 수학문제 오류를 지적하다 부당하게 해고된 김경호 교수의 일명 석궁사건을 다룬 '부러진 화살'(2012)까지. 1982년 영화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한 정지영 감독은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해 고발한다.

그럼에도 정지영 감독의 '소년들'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생략된 그 시간은 과연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하는 점을 꼬집기 때문이다. 소년들이 갑자기 훌쩍 어른이 되어 관객들 앞에 나타난 것은 그들에게 16년의 세월은 삶이 중단된, 텅 비어버린 틈이기에. '소년들'의 외침을 보며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년들의 시간을 앗아간 것은 과연 누구일지를 말이다.
영화 '소년들' 11월 1일 개봉. 러닝타임 124분. 15세 관람가.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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