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필모그래피다. 최근 김규리의 출연작을 톺아보면 마치 그녀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 것 같다. 연기자 데뷔 초의 KBS 서부터 비중 있는 박나리 역할을 맡았고 MBC 와 에서 말 그대로 타이틀롤을 맡았던 그녀는 오히려 최근 영화 , , 등에서 분량은 적되 인상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최근 MBC ‘사랑을 가르쳐드립니다’를 비롯해 이번 23회 ‘어서 말을 해!’까지 단막극에 출연하는 그녀의 마음가짐이 궁금한 건 그래서다. 서른둘, 어쩌면 이제 더더욱 분량과 비중에 욕심을 낼 시기의 이 여배우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이번 을 포함해 최근에만 단막극 두 편을 찍고 있다.
김규리 : 많은 시도를 할 수 있고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단편을 좋아한다. 배우로서 워밍업 하기에도 좋다. 짧은 책 하나에 기승전결이 있기 때문에 단막극을 많이 접하면 호흡을 어떻게 가져가야겠다는 흐름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처음 연기하는 친구들에게는 단막극을 많이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가리지 않고 한다”
KBS <드라마 스페셜>│김규리 “나는 배우를 하면서 나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김규리 “나는 배우를 하면서 나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
말한 것처럼 단막극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들이 있고, 이번 ‘어서 말을 해!’도 그렇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나.
김규리 : 단편이든 장편이든 그 극의 실질적인 화자가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기영(배수빈)이다. 대본을 보면 작가의 마음이 느껴지는데, 분명 남자가 작가이겠거니 싶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작가님께서 솔직히 말씀하신 게, 내가 맡은 영희 부분을 쓰기 어렵다고 하시더라. 감정을 어떻게 이입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사실 그래서 처음 대본을 볼 때는 영희라는 아이가 좀 생뚱맞았다. 아마 이러지 않을까, 하고 감정을 따라 가다보면 다른 방향으로 널을 뛰고. 보통은 대본의 첫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세 번을 읽었다. 그러면서 내가 이러이러하게 감정선을 잡아가보자, 생각했더니 영희와 기영의 관계가 되게 귀여워 보이더라.

그런 고민을 할 법한 게, 70분 내에 좋아하는 감정이 구병(방중현)에게서 기영이로 어느 순간 넘어가야 한다. 비록 이용하는 것이긴 하지만 중간엔 생수 나르는 아저씨와도 잠깐 만나고.
김규리 : 심지어 처음 대본에서는 영희가 생수 아저씨도 좋아하는 거였다. 그 라인을 다 새로 짠 거다. 기영이를 잡기 위해 생수 아저씨를 이용하자고. 안 그러면 영희가 문제가 있는 애지. 한 작품 안에 세 명의 남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니. 그런 부분을 윤성식 감독님께서도 똑같이 고민하셨고, 대화를 통해 새롭게 감정선을 잡아가고 있다.

그래서 연기적인 부분에서 고민이 많을 것 같더라. 처음에 좋아하는 인물이 구병이지만 또 너무 확 기울어져 있으면 안 될 거 같은데.
김규리 : 구병은 이런 사람이 애인이면 너무 좋을 것 같다는 환상 속의 인물 같은 거다. 이상형. 내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한 장의 이미지를 사랑하고 있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한 루머 때문에 그것이 깨지는 거고. 그러면서 기영의 마음이 어떨지 떠보게 되는 거다. 괜히 영화 보자고 하고, 공원에도 의도적으로 데려가고. 단 둘이 있으면 어떨지 일종의 테스트를 하는 거지.

말하자면 단막극의 호흡에 맞춰 새롭게 감정선을 정리하는 건데 이런 작업이 재밌나.
김규리 : 이야기가 재밌고, 그 이야기에 내가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장편이든 단편이든 가리지 않고 한다. 내가 배우로서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참여한다.

“행간을 읽어내고 표현해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KBS <드라마 스페셜>│김규리 “나는 배우를 하면서 나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김규리 “나는 배우를 하면서 나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 그래서일까. 영화 , , 등에서는 분량은 적지만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김규리 : 대사가 많고 신이 많다고 주인공인 건 아닌 거 같다. 어차피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스태프부터 보조 출연자까지 주인공 아닌 사람이 없다. 그 사람이 빠지면, 가령 마이크 붐을 든 스태프가 없으면 음성 픽업이 안 된다. 결국 모두가 소중하다면 나는 배우 김규리로서 분량의 볼륨보다는 ‘이 역할을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없어’라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멋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원래 그렇게 철든 타입이었나. (웃음)
김규리 : 나는 어떤 면에서 뜻하지 않게 초반부터 주연을 많이 맡은 편이다. 그래서 연기를 열심히 했는데 ‘넌 욕심이 너무 많다’는 얘기만 들을 때가 있었다. 가끔 피해도 입고. 그냥 평탄하게만 작품을 했다면 이런 생각을 안 했을 수도 있지. 또 워낙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편이다. 생각이 많긴 하다. 넷째 딸이라 눈칫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웃음) 어릴 때부터 말과 행동을 하기 전에 ‘아, 이렇게 해야 하나’ 머리로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멋있는 배우가 된다는 건 카메라 바깥에서의 생각과 고민이 필요하겠다.
김규리 : 그럼. 카메라 안에 있는 시간은 얼마 안 된다. 개인적으로는 요즘 시가 과거처럼 많이 예쁨 받지 못하는 게 아쉽다. 느린 호흡으로 행간을 읽고 음미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는데 나름 시가 사랑 받던 시기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런 걸 할 줄 아는 배우가 되고 싶다. 글과 글 사이의 행간을 읽어낼 줄 알고 표현해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행간을 읽어낸다는 건 단순히 독해력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삶을 풍성하게 사느냐의 문제일 수 있다.
김규리 : 풍성하게 사는 게 너무 좋지. 직접 경험이 제일 좋고. 그래서 나도 틀을 깨고 나오려 노력하는 편인데 그럼에도 경험하지 못하는 게 많다. 그런 건 결국 책 같은 걸 통해 해결하기도 하고.

시 이야기도 했는데 어떤 책을 읽는 걸 좋아하나.
김규리 : 법정스님 책을 많이 좋아해서 다 구비해놓고 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늘 읽는다. 의 짤막한 글도 지침서 삼아 자주 읽고. 많이 되뇌려 한다.

언제 그런 게 필요한가. 마음이 언제 흔들리나.
김규리 : 우선 내 직업이 누군가의 다른 인생을 표현하는 것 아닌가. 매 순간. 지금 같으면 영희가 됐다가 다시 나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런 걸 많은 시간 반복하면 경계선이 불분명해지고 현실 감각을 잃는다. 배우들 모두가 겪는 고통이기도 한데, 그러면 자아가 혼란에 빠진다. 내가 나답지 못하게 됐을 때 이런 글을 읽으면 도움이 된다.

혹 배우로서의 그런 고통이 스스로에게 도움이 될 때도 있나.
김규리 : 그러면서 성장을 하는 거지. 배우는 사람의 마음을 따라가는 직업이다. 저 사람은 왜 옷을 저렇게 입었을까, 누굴 만날까, 저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렇게 마음을 쓰고 남의 마음을 아는 직업. 그리고 나는 배우를 하면서 나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원래 생각만 많고 소심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아이였고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다. 그러다 연기자가 되고 주목을 받고 사랑을 받으면서 나도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됐다.

그렇다면 그걸 작품으로서 환원하고 싶은 생각도 있겠다.
김규리 : 연기자라는 게 브라운관을 통해 내가 느끼는 따뜻한 사랑을 전달하는 매개체 아닐까. 꼭 사랑스러운 역할을 맡지 않더라도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거다.

그럼 이번 ‘어서 말을 해!’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게 있다면.
김규리 : 설레임? 우리가 연애 감정을 느낄 때 가슴 한 쪽이 아프지 않나. 시청자가 봤을 때 그런 느낌을 주거나, 아니면 시린 가슴을 어루만져줄 수 있을 것 같다.

글. 위근우 eight@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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