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황성운 : 기차는 멈추지 않고 달린다. 보는 사람은 달리지 않는다. ∥ 관람지수 6 / 혁명지수 6 / 디테일지수 6
인류가 발전시킨 과학이 재앙의 불씨가 됐다.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살포한 화학 물질 CW7으로 인해 전 세계가 꽁꽁 얼어버린다. 간신히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만이 신 ‘노아의 방주’인 설국열차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탔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꼬리 칸에 갇혀 인간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17년. 꼬리칸의 리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보안 설계자인 남궁민수(송강호), 요나(고아성) 부녀의 도움을 받아 열차 설계사 월포드(에드 해리스)가 있는 머리칸을 향해 나아간다. 이들의 혁명은 성공할 수 있을까.
정시우 : 기차는 멈추지 않고 달린다. 영원히 멈추지 않았으면 했다. ∥ 관람지수 9 / 혁명지수 8 / 디테일지수 8
황성운: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혁명을 일으키는 이유는 분명했고, 설득력도 충분했다. 기차란 폐쇄되고, 한정된 공간에서 한 칸 한 칸 전진하는 모습은 꽤나 긴장감을 자아낸다. 좁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액션도 짜릿하다. 문제는 혁명의 기운이 최고조에 오른 중반 이후부터다. 1차 혁명에 성공한 이후 이야기, 긴장감, 설득력 등 모든 부분에서 조금씩 덜컹거린다. 맨 앞 칸까지, 홀로 진격하는 커티스의 행보를 따라가기엔 동력도 부족하고, 긴장감도 떨어진다. 더 문제는 이를 유지할 만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커티스에 의존하지만 갈수록 커티스가 왜 혁명을 시도했는지조차 잊어버릴 정도다.
ADVERTISEMENT
극 중 인물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주제는 다소 실망스럽다. ‘직설화법’으로 전해지는 주제는 스크린을 넘지 못한다. 모자는 머리에 쓰고 신발을 발에 신어야 한다는 것, 개체수를 조절하고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것,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투쟁 등 고리타분한 것들의 나열이다. 따분한 수업을 듣는 것 같다. 물론 기차의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에 있어 작은 반전을 결말에 심어 놓았다. 이를 위해 차곡차곡 쌓아둔 게 많지 않다 보니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기차의 절대자 윌포드(에드 해리스)와 꼬리 칸의 정신적 지도자 길리엄(존 허트), 이들의 존재가 굉장히 충격적이어야 했으나, 아무래도 커티스만 충격을 먹은 듯싶다.
사실 ‘설국열차’는 위험성이 많은 영화다. 한정된 공간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단조로움을 안고 갈 수 밖에 없다. 초반에는 슬기롭게 극복한다. 꼬리 칸,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볼거리를 제공했고, 그들의 삶도 흥미롭게 비춰진다. 꼬리 칸 사람들의 주식은 양갱 같은 단백질블록. 아마 영화를 보고 나선 양갱이 혐오스럽게 느껴질지도. 양갱 제조 회사에선 이 영화를 굉장히 싫어할 것 같다. 여하튼 초반에 보여 지는 영화의 설정들은 시선을 집중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다. 이 역시 끝까지 유지하는 게 관건이다. 커티스를 통해 드러나는 앞 칸의 모습, 점점 흥미가 떨어진다. 거대한 온실, 수족관, 나이트클럽, 미용실 등 식상한 칸이 대부분이다.
ADVERTISEMENT
화끈한 액션이나 천만 기운이 넘치는 영화를 기대하며 극장문을 열었다면 적잖이 당황할 관객이 적지 않을 것이다. ‘설국열차’는 여러 부분에서 관객이 예상한 길을 탈선하는 영화다. 예측을 거스르는 줄거리, 냉정한 캐릭터 운용, 시시각각 옷을 바꿔 입는 미술디자인, 심지어 그 비좁은 공간을 망원렌즈로 잡아내는 박력까지. ‘설국열차’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봉준호식 작업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리우드식의 빤한 장르물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다른 의미에서의 영락없는 봉준호 영화인 셈이다. 한국적 정서 같은 말에 기대지 않고 말들어낸 봉준호식 영화 말이다.
‘설국열차’는 문제적 영화다. 논쟁을 일으켜서 문제적 영화라는 게 아니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열려있다는 점에서 문제적 영화다. 계급, 이데올로기, 인종차별, 신자유주의 등 다양한 단어가 ‘설국열차’ 앞에서 설전 중이다. 봉준호 스스로도 “그 다양한 해석에 놀랄 때가 있다”고 했는데, 자신이 의도한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받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설국열차’는 확고한 정치적 메시지를 장착한 영화이지만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얽매인 영화는 아니다. 커티스를 위시한 꼬리표 칸 사람들에게 계급이니 정치니 하는 단어들은 썩 어울리지 않는다. 이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그저 자유에 대한 열망, 하루라도 인간적으로 살고 싶은 본능이다. “자기를 둘러싼 시스템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그린 작품”이라는 봉준호의 얘기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설국열차’는 희망에 대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희망이 미완성일 때 희망은 가장 강렬한 법이다. 이 속성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에서 ‘설국열차’는 영리하다.
ADVERTISEMENT
틸다 스윈튼은 우리가 그녀에게 기대했던 만큼, 혹은 그 이상을 보여준다. 송강호는 분량이 (생각보다) 많지 않지만 비중은 (예상보다) 크다. 크로놀에 매순간 취해있는 남궁민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열차 안에서 가장 ‘깨어 있는 자’다. 모두가 기차의 앞문을 뚫는데 혈안이 된 상황에서 ‘또 다른 문’을 바라보는 건 그가 유일하다. 결국 봉준호의 이상을 실어 나르는 건 그의 오랜 파트너인 송강호인 셈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가장 많은 이익을 챙길 건 크리스 에반스로 보인다. 근육이 아닌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깊게 바라 본 적이 있었던가. 크리스 에반스는 이 영화를 통해 재평가될 것이다. 이 모든 게 궁금하다면, 당장 탑승하시라!
글. 황성운 jabongdo@tenasia.co.kr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