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텐아시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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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계의 역사라 할 수 있는 또 한 명의 원로배우 이순재가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약 70년간 연기자 생활을 해온 만큼 많은 선후배, 동료들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따뜻한 조언과 따끔한 일침, 그리고 연기를 향한 끝없는 열망이 담긴 발언들까지. 연기자로서 대중 앞에 서는 연예인으로서 본보기가 됐던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생전 어록을 살펴봤다."예술은 영원한 미완성…나는 완성 향해 도전"(60회 백상예술대상 특별무대)
이순재는 지난해 5월 7일 열린 제60회 백상예술대상에서 특별무대를 선보였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연극은 69년 차 배우 이순재가 오디션에 참가해 연기에 대한 열망과 도전 정신을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늙은 배우가 필요하다고 해서 찾아온 접수번호 1번"이라며 무대에 등장한 이순재는 연기자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어필했다. 또한 객석에 있는 최민식에게 연기 호흡을 맞춰보자고 제안하고, 이병헌에게 '한국판 대부'를 해보자고 했다. 또한 "배우는 항상 새로운 작업에 대한 도전이다. 연구 안 하고 공부 안 하고 어떻게 창조가 되겠는가"라며 "연기는 쉽지 않다. 연기에는 완성이 없다. 우리는 완성을 향해 고민하고 노력하고 도전해야 한다. 그게 배우의 생명력이다"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예술이란 영원한 미완성이다. 그래서 나는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한다"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무대에서 내려갔다. 객석의 수많은 후배가 기립박수를 보냈고, 유연석은 눈시울을 붉혔다.
사진='유 퀴즈 온 더 블록' 영상 캡처
사진='유 퀴즈 온 더 블록' 영상 캡처
"무대에서 쓰러지는 것, 행복한 죽음"(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록')
이순재는 지난해 4월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약 70년간 걸어온 자신의 연기 인생을 돌아봤다. NG를 거의 내지 않는다는 이순재. 그는 "더러 NG 낼 때는 있다"면서도 "열심히 대본을 익히고 촬영 들어가기 전에 맞춰보면 NG 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또한 "배우에게 기억력은 자존심 문제"라며 "대사를 까먹는 건 동료와 후배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나름대로는 기억력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미국 대통령 이름을 외워보거나 한다"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전했다.

고령에도 이순재는 연기 열정이 대단했다. 그는 "연기는 쉬운 게 아니다. 지금도 하다 보면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이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어느 시대의 대가가 있을 뿐이지 그것이 그 예술의 끝은 아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게 연기자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순재는 죽음을 떠올리며 먼저 세상을 떠난 절친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가면 6명이 저승에서 만날 수가 있다"며 "사람의 생사는 장담할 수 없다. 노력은 하지만 노력한다고 꼭 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장 행복한 건, 공연하다가 죽는 것이다. 무대에서 쓰러져 죽는 게 가장 행복한 죽음이다. 그게 배우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사진='해피투게더4' 영상 캡처
사진='해피투게더4' 영상 캡처
"연예인에게 무슨 특권"(2019년 영화 '로망' 홍보 인터뷰)
2018년 말부터 연예계에서는 승리를 주축으로 한 일명 '버닝썬 게이트'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순재는 그즈음 개봉한 영화 '로망' 인터뷰에서 '연예계 어르신'다운 따끔한 일침을 날리며 책임 의식을 강조했다.

이순재는 "특권의식은 의식일 뿐이다. 연예인에게 무슨 특권이 있느냐"라고 지적했다. 이어 "연예인은 행위 자체가 전파성, 영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공인이 아니라도 공인의 개념이 있다. 그렇기에 행동을 조심하고 절제해야 한다"라고 했다. 또 "예술가이므로 자유로울 수는 있다. 그러나 최근 일어난 일은 사회적 패악이다. 있을 수 없는 문제"라고 따끔하게 꾸짖었다.

이순재는 "팬은 내가 존재하는 데 가장 고마운 존재다. 감사하고 겸손해야 한다. 더욱이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 아이돌은 우상화돼 있다. 책임감을 느끼고 절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자기 관리를 열심히 하고, 보다 더 좋은 노래, 좋은 연기를 선보이는 데 집중해야 한다"며 "주변에서 유혹이 많을 것이다. 그걸 이겨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능 '해피투게더4'에서도 "우리가 공인은 아니지만 공인적 성격을 띠고 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 관객들,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스스로 자퇴해야 할 사람들이다. 자기 관리를 철저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인정하지만 학점은 C"(예능 '라디오스타'에서 교수로서 일화를 얘기하며)
이순재는 13년간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세종대 영화에술학과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이에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스승 이순재. 현역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유연석, 공효진, 한지혜 등도 이순재의 제자다.

이순재는 예능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교수로서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당시 수업을 듣던 한지혜가 드라마 '자이언트' 주연 발탁으로 인해 수업에 매번 출석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이순재는 "작품 하나를 정해놓고 한 학기 동안 진행한 수업이었다. 학생들이 매일 연극 연습을 해야 하는 수업이었다. 한지혜는 드라마 촬영 때문에 계속 참여할 수 없어서 C학점을 줬다"고 밝혔다. 한지혜가 "선생님 전 어떡하나"라고 했지만 이순재는 "인정은 하지만 C학점을 주겠다. 다른 학생들은 네가 빠지는 동안 열심히 연습하고 있을 거다"라고 했다고. 그러면서도 이순재는 한지혜를 기특하게 여겼다. 한지혜에게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돈을 버니까 연습하러 올 때 빵을 사와라"고 했더니 한지혜가 정말로 빵을 사 왔던 것. 이순재는 "내가 한 말을 잘 지키는 걸 보고 기특하다고 생각했다"며 미소 지었다. 제자에게 엄할 때는 엄하면서도 예뻐할 때는 예뻐한 스승 이순재의 모습이었다.
사진='회장님네 사람들' 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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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5번 해"(이승기·이다인 부부를 위한 주례사에서)
이순재는 수많은 연예인의 결혼 주례를 서주기도 했다. 특히 2023년 이승기·이다인 부부를 위한 19금 주례사는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들 부부에게 "왕성할 때 적극적으로 사랑하란 말이다. 일주일에 5번은 해라. 힘 빠지면 못 한다"라고 조언했다. 화끈하고 솔직한 주례사는 하객들까지 웃게 했다.

이후 한 예능에서 19금 주례사에 대해 이순재는 "노골적으로 표현한 건 아니다. 결혼의 전제조건이 뭐냐. 성의 결합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얘기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예능에서는 "젊었을 때 사랑의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평생 같이 살다 가면 인생의 힘든 순간들이 있다. 이 갈등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게 사랑의 기억이다. 좋은 사랑의 추억을 만들어라. 그 이상 좋은 게 어딨나"라며 자기 경험을 빌려 이야기했다.
사진='KBS 연기대상' 영상 캡처
사진='KBS 연기대상' 영상 캡처
"신세 많이 졌다"(KBS 2024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이순재는 지난해 KBS 2024 연기대상에서 드라마 '개소리'로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 상은 이순재 생애 마지막 대상이 됐다. 이순재는 "나이가 들어도 잘하면 상을 줘야 한다. 공로상이 아니라, '연기'만으로 평가해야 한다. 인기나 다른 조건으로 평가해선 안 된다"며 연기를 향한 올곧은 태도를 드러냈다.

이순재는 제자들, KBS와 제작자, 시상자 최수종을 비롯한 후배들,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는 "늦은 시간까지 와서 격려해주신 시청자 여러분, 집에서 보고 계신 여러분, 평생 신세 많이 지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70년 연기 인생을 자신의 생과 함께 마무리한 '대배우' 이순재. '영원한 현역' 이순재는 이렇게 한국 연예계에 큼직한 족적을 남겼다.

이순재의 영결식은 27일 오전 5시 30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거행된다. 사회는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고인의 사위 역할이었던 배우 정보석이 맡았다.

김지원 텐아시아 기자 bella@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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