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사례를 보면 영화 '세계의 주인'의 주인공 서수빈이 떠오른다. 이 영화는 독립영화계 레전드로 꼽히는 윤가은 감독의 작품으로, 서수빈의 배우 데뷔작이다. 이 작품에서 서수빈은 10대 여성의 성과 사랑, 그리고 트라우마를 주제로 현실감 있는 연기를 보여준다.
지난 20일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서수빈을 만났다. '세계의 주인'은 열여덟 여고생 이주인(서수빈 분)이 전교생이 참여한 '아동 성범죄자 출소 반대 서명운동'을 홀로 거부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서수빈은 대본을 받으러 윤 감독을 만나러 가던 날을 회상했다. 그는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준다며 사무실로 불렀는데, 사무실에 가는 날까지도 왜 내가 가는지 모르겠더라. '잘못한 게 있어서 혼날 게 있나' 싶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갔다"며 웃었다.
집에 가서 시나리오를 읽은 뒤 문자를 남겨달라고 요청했다는 윤 감독. 영화 속 주인은 활발하고 씩씩한 여고생으로 보이지만, 내면엔 남모를 트라우마가 있다. 서수빈은 "읽고 나서 감정이 소용돌이쳐서 울었다. 감독님한테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데, 어떤 말로도 전달이 안 될 것 같더라. 그래서 눈물 흘리는 내 모습을 찍어 보냈다. 감독님이 눈물 셀카는 오랜만이라고 했다"며 웃었다.

서수빈은 가장 부담스러웠던 장면으로 주차장 신을 꼽았다. 극 중 밝은 모습만 보여줬던 주인이 애써 억누르고 있던 내면의 상처와 아픔을 마주하고, 엄마에게 그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는 신이다. 시끄러운 세차 기계 소리에 주인의 울부짖음이 뒤섞이며 주인이 품어왔던 고통이 더 극적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서수빈은 "학교 신들과 달리 감독님이 세차장 신은 한 번도 연습시키지 않았다. 전체 리딩 때 한 번 하고 바로 현장에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감독님이 내가 주인의 내면을 그날 맞닥뜨리게 해주려고 그런 것 같다. 혼자 연습실에서 소리 지르며 연습해봤을 때보다, 그날 세차하는 차 안에서 집중해서 연기했을 때 더 주인의 감정을 만난 것 같았다"고 했다.
서수빈은 세차장 신 촬영 비하인드를 언급하며 모녀 사이로 연기 호흡을 맞춘 장혜진에게 고마워했다. 그는 "세차장 신에서 순간 집중이 안 되고 불안했던 적이 있다. 선배님이 내 손을 잡아주며 진정시켰다. 이런 일이 많이 생길 수 있는데, 대처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하니 신기하게도 다시 집중됐다. 이렇게 해 주지 않았으면 불안한 상태로 그 장면을 계속 찍었을 것 같아서 아찔하다"고 말했다.

아이돌을 그만둔 이유에 대해 서수빈은 "팀 이미지가 저와 맞지 않았다. 정리하고 돌아와서 진로 고민을 했지만 아이돌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배우로 전향했다"고 밝혔다. 이어 "배우 일을 하다 보니 아이돌을 그만둔 건 오히려 배우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배운 노래, 춤이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윤가은 감독은 '우리들', '우리집'으로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보석 같은 배우들을 발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의 주인' 주인공 서수빈의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는 서수빈은 "생각 중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나 백엔의 사랑'과 같이 땀 냄새나고 몸 쓰는 연기를 할 수 있는 스포츠 소재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답했다.
같이 연기해보고 싶거나 좋아하는 선배가 있냐는 물음에는 "모든 선배와 함께 연기하고 싶다"면서도 "천우희 선배님"이라고 수줍어하며 말했다. 이어 "박정민 선배는 토론토영화제에서 이미 만난 것으로도 여한이 없다. 배두나 선배도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
김지원 텐아시아 기자 bella@tenasia.co.kr
ADVERTISEMENT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