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팝은 2020년대 들어서 '확장'을 시도했다.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음악 장르에서 글로벌 대중들이 좋아하는 장르로 바뀌고자 했다. 해외 프로듀서를 영입하고 해외 일반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는 멜로디와 가사가 장착됐다. 이때부터 한글은 슬그머니 조연으로 밀려났다. "K팝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우려와 "K팝은 가사가 아닌 하나의 음악적 표현방식"이라는 반론이 팽팽히 맞섰다.
2024년 들어선 어땠을까. 본지가 오픈AI인 '챗GPT'를 이용, 2024년 K-팝 히트곡들을 분석해봤다. 한글 가사는 '해외 시장 성공'이라는 목표하에 뒷전으로 밀려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글 가사를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였다. 'K팝 다움'과 한글 가사 비중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해볼 필요가 있는 '임계점'에 닿았단 평가다.

본지 가요 취재팀이 2024년 멜론 월간차트 10위 이상 이름을 올린 음원을 분석한 결과 걸그룹 음악 가사의 평균 영어 비율은 70.6%로 나타났다. 전체 15곡 중 가장 영어 가사 비율이 높았던 음원은 그룹 뉴진스의 'How Sweet'(하우 스윗)이었다. 해당 곡의 84.48%가 영어로 구성돼 있었다.
올해 멜론 월간 차트 10위권에 가장 많은 곡을 올린 아티스트 에스파의 음원도 영어 가사가 주를 이뤘다. 에스파의 'Drama'(드라마), 'Supernova'(수퍼노바), 'Armageddon'(아마겟돈) 세 음원의 평균 영어 가사 비율은 68.95%였다.
그 외 영어 가사 비율은 그룹 키스 오브 라이프의 'Sticky'(스티키)가 77.16%, 아일릿 'Magnetic'(마그네틱)이 80.47%, 르세라핌 'EASY'(이지)가 72.73%, 베이비몬스터 'SHEESH'(쉬시)가 75.73%로 전반적으로 높았다.

한국 가사를 적극적으로 쓰고 차트에서 두각을 보인 곡은 그룹 (여자)아이들의 '나는 아픈 건 딱 질색이니까'와 그룹 아이브의 '해야' 단 두 곡에 불과헀다. 해야는 한국어 가사가 80.84%를 차지하는 보기 드문 사례다. 걸그룹 음악의 경우 한국어 비중이 50% 이상인 곡을 찾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보이그룹은 그나마 한글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걸그룹은 노래가 불특정 다수 대중들에게 많이 노출되고 소비돼야 하는 반면, 보이그룹은 팬덤을 기반으로 한 퍼포먼스 뮤직이 주를 이루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가사 접근성'에 있어서 걸그룹보단 보이그룹이 운신의 폭이 넓단 뜻이다.
지난해 국내 최대 음원 사이트 멜론 차트 월간 TOP10에 이름을 올린 남자 아이돌은 엑소, 지코, 데이식스, 라이즈, 투어스 등이 있다. 투어스가 '첫 만남은 계획되지 않아'로, 라이즈가 '러브119'(Love 119)로 차트 상위권을 차지했다.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의 가사는 한국어 79.86%, 영어는 20.14%로 구성됐다. 이 곡은 미국 빌보드 베스트 K팝 5위에 안착했다. 빌보드는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가 빌보드 '글로벌 200'에 두 달간 장기 차트인했다고 강조했다. '러브 119'은 영어의 비중이 더 높았으나, 해외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한국어는 35.15%에 그쳤지만 영어는 64.85%까지 쓰였다.
데이식스는 한글 지킴이라 할 만 했다. '예뻤어',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 '녹아내려요', '해피', '웰컴 투 더 쇼' 등 5개 곡으로 차트인했다. 공감가는 가사로 주목받은 그룹답게 한국어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다. 특히 '예뻤어'와 '녹아내려요'는 각각 한국어가 96.72%, 94.19% 쓰였다.


BTS 정국은 영어 100% 가사를 시도했다. 정국의 '골든'(golden)은 빌보드 결산에서 80위를 차지했다. BTS는 이미 자타공인 글로벌 스타인 만큼, 영어 가사 비중을 높인 곡들을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더 높이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전 가사가 영어인 '다이너마이트'(Dynamite)와 같은 사례도 마찬가지다.
해외에서는 크게 주목 받지 못했지만 영어 가사를 앞세워 국내서 주목받은 곡들도 있다. 지드래곤의 '파워'(POWER)와 지코의 '스폿(SPOT!)'이다. 각각 영어 가사 비중이 78.1%, 70.6%에 달했다. 빌보드 연말 차트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한글=K팝 아니라지만
주요 걸그룹의 히트곡 한글 가사 비중이 30%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본지 분석으로 처음 확인됐다. 문제는 한글 가사와 K팝 정체성 간의 관계다. K팝에서 한글 가사 비중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동안 꾸준히 있어왔다. 하지만 K팝은 단순히 한글 여부가 아닌 K팝이란 음악적 장르의 문화적 배경, 제작환경, 연출 스타일 등에 따라 규정될 수 있다는 게 가요계의 반론이었다.
K팝의 음악적 특성으로는 장르적 융합, 중독성 있는 멜로디, 화려한 구성 등이 손꼽힌다. 화려한 안무와 세련된 비주얼 그리고 강력한 팬덤 문화는 K팝이 갖고 있는 특성으로 여겨진다. K팝만의 아이돌 육성 시스템도 K팝다움을 만드는 하나의 이유로 꼽힌다.

K팝의 제작 시스템도 고유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K팝 아이돌 육성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한국적인 제작 환경과 한국 감수성은 계속 변한다. 하지만 한글이라는 언어적 특성은 K팝을 만드는데 변치 않는 요소다. 이대로라면 '미국 K팝', '한국 K팝' 등으로 장르가 쪼개질 가능성도 있다. K팝의 산업적 규모가 더 커지면 타국의 후발주자들이 한글을 잃어버린 K팝다움을 벤치마킹할 수도 있다. 시장이 커지면 경쟁자가 늘어나는, 산업의 역사다. 한글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K팝다움은 그 자체로 진입 장벽이다. K팝과 한글 가사 비중이 정말 무관한 지 가요계가 다시 한번 고민해 볼 시기다.
이민경 텐아시아 기자 2min_ror@tenasia.co.kr
김지원 텐아시아 기자 o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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