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라이스
전라남도 지방에는 ‘씻김굿’이라는 게 있다. 죽은 자의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주는 굿이다. 그런데 저 멀리 바다를 건너온 데미안 라이스의 음악이 그와 같은 ‘씻김’의 작용을 했다. 신기한 노릇이다.
지난 22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 위치한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는 데미안 라이스의 내한 공연이 열렸다. 무대는 단출했다. 스탠딩 마이크와 몇 개의 조명들이 세트의 전부. 스트링은커녕 밴드가 들어설 자리도 없었다. 잔잔한 공연이겠구나, 생각했는데 엄청난 오산이었다. 데미안 라이스의 공연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델리케이트(Delicate)’로 막을 연 공연은 2시간가량 이어졌다. 공연 초반, 데미안 라이스는 곡에 얽힌 일화에 농담을 섞어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주물렀다. ‘엘리펀트(Elepehent)’와 ‘더 박스(The Box)’가 흐르며, 다소 어색했던 공기가 이내 유쾌하게 바뀌었다. 관객들은 어느덧 긴장을 풀고 자연스레 공연에 빠져들었다.
데미안 라이스
“어느 날 친구의 집을 방문했어요. 그녀가 ‘오늘 자고 가도 돼. 내 침대에서 머물러도 좋아’라더군요. 우린 친구였고 저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죠. 2초 동안 한 편의 영화가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2초 뒤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어요. ‘나는 여동생 방에서 자면 돼’. 난 여태까지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나지막한 기타 소리와 함께 데미안 라이스는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어갔다. 관객들은 그의 짓궂은 농담에도 편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는 덧붙였죠. ‘창문 너머 별들을 바라 봐. 네가 해야 할 일은 너 자신과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야.’ 나 자신과 시간을 보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했어요. 한참동안 별을 바라봤는데 풍경이 휘어져 보이더군요.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이 노래를 썼어요.”
‘에이미(Amie)’가 시작됐다. 노래는 원곡보다 길게 이어졌다. 데미안 라이스는 루프 스테이션을 이용해 혼자서 화음을 겹겹이 쌓았다. 감동도 겹겹이 쌓였고 여운도 길게 남았다. 그는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다음 곡은 ‘9 크라임스(9 Crimes)’. 서서히 고조되던 감정은 어느새 절규에 가까운 외침으로 이어졌다. 번뜩, 섬광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가 거칠게 노래를 토해낼수록 섬광은 더욱 잦게 터져 나왔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데미안 라이스
‘올더 체스트(Older Chests)’, 즉석에서 요청을 받아 연 ‘캐논 볼(Cannonball)’, ‘더 그레이티스트 바스타드(The Greatest Bastard)’, ‘아이 리멤버(I Remember)’ ‘더 프로페서 & 라 피 당스(The Professor & La Fille Danse)’가 거침없이 이어진 뒤, 데미안 라이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에는 노래를 잘 하는 분들이 많죠. 이 자리에도 많을 거고요. 혹시 ‘콜드 워터(Cold Water)’ 아시는 분 있나요?” 무대에 오르는 행운은 한 여성 팬에게 돌아갔다. 수줍으면서도 맑은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에 관객들은 환호와 함께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무대 위 두 사람 뿐만 아니라, 무대 아래 3,500 여명의 관객들까지 깊은 교감하는 듯 보였다.
압권은 뭐니 뭐니 해도 본 무대의 마지막 곡인 ‘’잇 테이크스 어 랏 투 노 어 맨(It Takes A Lot To Know A Man)’였다. 무려 10분에 달하는 편곡. 데미안라이스는 루프스테이션을 활용해 어쿠스틱 기타, 벨, 클라리넷, 북, 일렉트릭 기타를 하나씩 쌓아갔다. 그 에너지가 어찌나 강렬하던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진이 쪽 빠질 지경이었다. 관객들은 꼼짝도 못한 채 그의 무대에 빨려 들어갔다.
데미안 라이스
‘컬러 미 인(Colour Me In)’으로 시작된 앙코르 무대는 ‘마이 페이보릿 판타지(My Favorite Fantasy)’, ‘더 블로워스 도터(The Blower`s daughter)’, ‘볼케이노(Volcano)’로 이어졌다. 마지막 곡 ‘볼케이노’에서는 데미안 라이스가 무대 아래로 내려가 마이크 없이 노래를 이어가기도 했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오세요”라는 데미안 라이스의 호출에 수많은 관객들이 그의 곁을 둘러쌌고, 함께 곡을 완성했다.
이날 관객들에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노래가 시작될 땐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가도, 환호와 웃음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유쾌했다. 흡사 ‘씻김’을 경험한, 정화된 영혼들 같았다. 공연장의 평화로움과 즐거움은 숫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데미안 라이스는 준비된 셋리스트 없이 즉흥적으로 공연을 이어가는 걸로 유명하다. 다가올 부산 공연에서는 어떤 종류의 ‘씻김’이 관객들을 위로해줄까. 데미안 라이스의 부산 공연은 오는 24일 오후 8시 벡스코 오디토리움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