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더 놀랄 일은 따로 있다. 코믹전문배우 김수로가 아내를 떠나보낸 민규 역으로 출연한다는 사실이다. “제가 김수로 씨를 오랫동안 지켜봤는데, 남들보다 일찍 가장의 위치에서 식구들을 건사해서 그런지 발랄하고 경쾌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언뜻 피곤함, 지침, 멍한 우울함이 비춰지더라고요. 그런 감성을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장르와 스토리 그리고 캐스팅까지 낯선 모습의 연속이지만, “절대적인 순간에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농담” 그리고 “어쩌면 를 보는 기분일 것”이라는 말에서 여전히 장진 특유의 웃음기와 색깔이 건재함을 암시한다. 그의 2011년은 후반작업과 연극 연출이 맞물리면서 “정신없게” 시작됐다. 이 모든 일정을 소화하느라 최신 음악을 들을 시간이 부족했던 그가 20대의 청춘을 함께 했던 “요즘에 쉽게 들을 수 없는 어쿠스틱 음악”을 골랐다. 각 곡을 추천하면서 “어우, 여기에 미쳤었죠. 캬, 이게 다 명반이거든요”라는 말을 반복하던 그의 미소를 상상하면서 들어보도록.

장진 감독의 첫 번째 추천 곡은 음반에 수록된 곡 ‘머리에 꽃을’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들국화를 좋아했는데, 사실 추억 들국화에 더 애착이 가요. 당시 우리나라 대중가요 가사들은 대부분 사랑인데다 기승전결이 뚜렷했는데, 이 노래만큼은 달랐어요. 무정부주의자가 이상한 판타지 세계에 들어가서 하나의 이데아를 노래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들국화 멤버였던 전인권과 허성욱이 만든 컴필레이션 앨범 는 들국화 1집이 지니고 있었던 치열함을 그대로 유지했는데, 그중에서도 ‘머리에 꽃을’은 민주화를 열망하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듯,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을 노래한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이상한 세상”임을 깨달았던 장진 감독에게는 “내용적으로 공감이 확 가지는 않았는데 이미지가 묘한” 곡으로 남아 있다.

“정말 고양이가 건반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인데, 이건 진짜 직접 들어봐야 알아요. 와, 너무 멋진 거야.” 마치 어느 광고에 나오는 ‘정말 좋은데 참 좋은데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라는 카피처럼, 장진 감독은 수많은 감탄사를 늘어놓고 난 뒤에야 본격적으로 곡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함춘호 씨는 지금도 최고의 기타리스트죠. 보컬 하덕규 씨는 미성과 비성이 섞여 있어서 독특한 보이스가 나오고. 제가 초반 기타연주는 흉내 낼 수 있는데, 중간에 애드리브 들어가는 부분에서는 어우, 엄두도 못 내겠더라고요. (웃음) 시인과 촌장 콘서트도 몇 번이나 가봤는데, 고양이를 예찬하는 그 잠깐의 시간은 언제나 멋져요.” 함춘호의 솔로연주로 시작되는 이 곡은 고양이의 날카로운 발걸음을 소리로 변환한 명곡이다.

시인과 촌장에 기타리스트 함춘호가 있다면, 어떤 날에는 이병우가 존재한다. 지금은 장진 감독의 을 비롯해 , , 등 한국영화계의 대표적인 음악감독으로도 알려진 기타리스트 이병우는 1986년 조동익과 함께 포크밴드 어떤 날을 결성해 두 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어떤날의 1, 2집 모두 가지고 있는데 정말 명반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장진 감독이 ‘출발’을 추천한 이유는 전적으로 이병우 때문이다. “음악계에서 굉장히 큰 존재시죠. 영화 로 처음 작업을 같이 해봤는데, 그분한테 영화 몇 편을 해서 얼마를 버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신기 내리실 때까지 기다려서 좋은 곡을 뽑아내세요. 멋지지 않아요?” 시작이 가져다주는 특유의 설렘을 노래하는 이 곡은 언제 들어도 좋지만, 그중에서도 봄이라는 계절과 잘 어울린다.

“들으면 참 좋은 곡인데, 왜 그렇게 일찍 가셔가지고…” 故김광석의 곡을 추천하던 장진 감독의 말꼬리가 잠시 흐려졌다. “옛날 음악을 듣고 있으면 그 곡을 부른 사람이 그리워진다”는 그는 잊혀져가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그날들’을 네 번째 추천 곡으로 선택했다. 이 곡은 분명 사랑노래다. 절제와 절규 사이를 오가는 목소리로 애절한 감정을 풀어내는 사랑노래.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그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흐르곤 했었던 그날들’이라는 가사는 묘하게 김광석을 가리키고 있다. “어렸을 때는 많이 듣지 않았는데, 요즘에 부쩍 많이 듣게 되더라고요. 이번에 같이 작업했던 촬영감독도 노래방 가면 만날 이 노래만 불러요.”

“심야에 운전하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우연히 이 곡이 흘러나왔어요. 어찌나 반갑던지.” 장진 감독이 ‘별이 진다네’를 반가운 마음으로 들은 것은 “옛날 음악”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홀로 어두운 밤거리를 운전하는 분위기도 분명 한몫했을 것이다. 풀벌레 소리가 공기를 가득 메우고 아름다운 통기타 소리가 그 위를 살포시 덮는 ‘별이 진다네’는 낮보다 밤, 그것도 별이 금방이라도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시골의 밤에 어울린다. 처음 마음속에 품었던 꿈들이 하나둘씩 사라진 채 현실의 높은 벽에 부딪히고 있는 사람들에게 잔잔한 위로가 되는 곡이다. 단, 한 번 들으면 무한 반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을 것.

글. 이가온 thirteen@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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