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이병헌이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를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하며 이같이 말했다. 미국 작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액스(The Ax, 도끼)'가 원작인 '어쩔수가없다'는 25년간 일한 제지회사에서 갑작스레 해고당한 만수(이병헌 분)이 재취업하기 위해 분투하는 얘기다. 이병헌이 이 같은 의문이 생긴 건 박 감독은 그간 잔혹성, 선정성 있는 작품들을 많이 선보여왔기 때문. '어쩔수가없다'는 잔혹성 수위는 낮추고 주인공들의 처절한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풀어 블랙 코미디 장르의 재미를 살렸다.

"감독님과의 예전 작업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공동경비구역 JSA' 할 때만 해도 우리가 모여서 아이디어를 배틀하듯이 냈어요. 그땐 질보다 양이었죠. 10개 내면 적용되는 건 하나 정도였어요. 이번에는 얘기할 때마다 '그렇게 하면 재밌겠다'며 다 적용하더라고요. 나중에 약간 겁이 났어요. '책임 전가하려고 그러나' 싶었죠. 하하. '이제 좀 말을 아껴야지' 하면서 후반부에는 아이디어를 거의 안 냈어요."
과거 하이틴 스타로 인기를 얻었던 이병헌. 하지만 '내 마음의 풍금', '런어웨이' 등 작품이 흥행에 실패, 드라마는 성공하지만 영화는 말아먹는 '국밥배우'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얼마 전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병헌은 "망한 감독과 망한 배우가 만나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으쌰으쌰 해보자고 한 게 '공동경비구역 JSA'"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이병헌뿐만 아니라 박찬욱 감독 역시 연속으로 흥행에 실패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덧 세월이 흘러 둘은 세계적인 거장 감독과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배우가 됐다. 이병헌은 "'망한 감독, 망한 배우'라는 얘기는 제가 미국의 LA 라크마 시상식에서 했던 말을 반복했던 것"이라며 공로상 수상자 박 감독을 위해 자신이 시상자로 나서 스피치했던 때를 돌아봤다.
"그때 박찬욱 감독과의 첫 만남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감독님은 한 편을 말아먹고 두 번째 시나리오를 준비했고, 나도 두 편을 말아먹고 세 번째 영화의 기술 시사회 현장이었죠. 조감독이 와선 '누가 찾는다'고 해서 갔더니 포니테일로 머리를 뒤로 묶은 누가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패션도 독특했어요. 비호감이었죠. 하하. 자기가 시나리오를 주고 싶은데 한번 읽어봐 달래서 '알겠다'고 하고 받았어요. 그런데 왠지 느낌은 안 하게 될 거 같더라고요. 그렇게 망하고 그 사람이 갑자기 또 시나리오를 주길래 봤더니 재밌었어요. 저분도 나도 계속 망해서 더 망할 것도 없겠다며 했는데, 그게 '공동경비구역 JSA'였죠. 저는 떨면서 그런 스피치를 했는데 관객들이 기립해서 박수를 쳐줬어요. 제가 스피치했지만 뿌듯하고 신났죠. 그 스피치를 끝내고 박 감독님과 포옹하고 공로상을 드렸어요. 잊지 못할 감독님과 저의 역사죠."

만수가 재취업을 위해 선택한 일은 경쟁자들을 '제거'해 나가는 것. 도덕적 판단력을 잃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만수지만 이병헌은 "만수를 연기해야 하는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수니까"라고 털어놨다. 이어 "관객들이 끝까지 만수를 응원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감독님에게 계속 푸시했던 점이 있다. '첫 번째 결심'을 하기까지의 모습을 더 설득력 있게 만들자. 저런 사람이 그런 결정을 하게 되기까지 처절하고 비참한 상황들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35년이 다 되도록 연기해온 이병헌이지만 이번 작품으로 해본 '첫 경험'도 있다. "베니스영화제 경쟁작 출품도 처음이고, 이 작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토론토영화제에서 공로상도 난생처음 받았어요. 또 앞으로 해야 할 새로운 경험들이 많이 남아 있어요. 아카데미(오스카) 후보작으로 아직 결정된 건 아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의 1년, 그러니까 연말, 연초에는 계속 그 일에 매달리게 될 겁니다. 그 또한 제겐 첫 경험이 될 거예요. 그리고 박 감독님의 영화에서 90% 이상 카메라가 저를 따라다니며 내 감정을 중심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는 것도 처음이고요. 어쩌면 제 필모그래피에 가장 자랑하고 싶은 작품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기분 좋은 추측을 해보는 것도 저한텐 큰 의미입니다."
김지원 텐아시아 기자 bella@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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